뜨거운 여름날 우리 경제사회를 달구기 시작한 「기아사태」의 해결을 둘러싼 공방은 일단 법정관리로 매듭이 지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쌀쌀해지기 시작한 가을날씨에도 불구하고 이 해법이 시원시원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만은 아니다. 특히 다른 해법을 주장해온 노동자들로서는 곧 찬바람과 함께 불어닥칠 이후의 사태에 대한 고민이 태산이다.이론적으로 말하자면 기아그룹의 부도문제는 경제적인 사안이지만 사태가 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답답한 정치 사회적인 현실이 그대로 노정되었다. 정부는 시장원리를 주장하다 법정관리로 밀어붙였는데, 표면적인 정책의 일관성보다 더 큰 문제는 현실을 호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공방이 벌어진 지난 100여일만 보자면 기아사태는 국민경제에 대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부도처리유예라는 정책사안으로 시작된 것이므로 이미 이때부터 순수시장원리는 현실에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명명백백하게 현실적인 정책을 폈어야 했다.
정부는 기아와 채권단 당사자간의 자율적 해결을 내세웠지만, 채권단(금융기관)이 정부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구조적 현실에서 이는 구두선에 불과하다. 실제 화의신청단계에서 채권단이 처음에는 수락의사를 비쳤다가 이미 정부의 법정관리방침이 천명됐기 때문에 곧바로 「불가」로 번복할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이 이를 말해준다. 이와 더불어 이전 과정에서부터 채권단이 집요하리만큼 「노조를 손봐줄 것」을 지원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움으로써 노사자율을 침해한 것도 정부의 입장과 무관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정부와 채권단이 이구동성으로 기존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한 것 역시 엄밀히 자율과 시장의 원리에 입각했던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필자는 기아사태의 초기부터 결국 법정관리로 귀결되고 말 것이란 전망을 했다.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왜곡된 시장과 정치사회적 현실이 사태를 그렇게 몰고갈 수 밖에 없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이 말을 듣는 「범기아정상화대책추진 비상대책위원회」관계자들의 얼굴을 덮던 그늘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고용불안과 항간에 널리 퍼져있는 3자인수 음모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잊을 수가 없다.
이것까지 포함하여 우리의 현실을 직시할 때, 기아사태의 앞으로의 해법은 분명해진다. 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불완전하고 왜곡된 시장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목적의식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3자인수와 관련된 음모설이 파다한 현실을 반드시 정책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 기아자동차의 공기업화로 일시적으로 모면할 것이 아니라, 자동차산업과 인수합병시장의 독과점적 구조를 감안하고 음모설 당사자의 당초 약속을 상기시켜 이 부분에 대한 정책적인, 나아가서는 정치적인 조정조치까지 취할 필요가 있다. 당사자가 교과서적 시장경쟁의 원리를 들고 나온다면 불완전 및 독과점적 경쟁에 관한 시장이론은 어느 교과서에도 결여되어 있거나 극히 취약하여 구체적인 경우에 따른 구체적인 정책을 펼 수 밖에 없다고 대답해 주면 될 것이다.
이는 고용불안의 해소와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지만, 보다 분명히 정부는 이후 발생할 노동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 이를 실시해 나가야 한다. 정부의 법정관리 결정발표가 있자마자 이것을 노동시장 유연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일각의 발빠른 개입을 노조와 정부는 범상히 넘겨서는 안될 것이다. 이 「개입 시장」만큼 왜곡된 시장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노조나 기아경영진의 정책개입을 위한 행동은 단일한 이론에 의존하기보다는 복합적인 현실에 바탕을 두어야 할 것이다.
다시 현실적으로, 이는 결국 차기정권이 책임있게 풀어야 할 과제이다.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왜곡된 현실시장에 완전경쟁시장의 이론을 적용하는 척 할 것이 아니라, 왜곡된 시장구조를 개혁함으로써 한국경제에 음모설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과감하고도 근본적인 정책이 단행되어야만 한다. 기아사태가 기업 차원만의 문제가 아니듯, 시장구조의 개혁도 결코 시장 차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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