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씨는 『옛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은 상황』을 위기로 정의한 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의 정치와 경제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선거때마다 동원되었던 도시 대 농촌, 민주 대 반민주, 보수 대 진보와 같은 사회적 균열이 많은 의미를 상실했다. 우리 정치를 구획해 왔던 지역구도조차도 무너지는 듯이 보인다. 그 결과 거의 무원칙해 보이기까지 하는 정치권의 이합집산이 빚어지고 있다.경제분야에서도 성장연대의 여러 「신화」들이 무너지고 있다. 경제발전 수준에 비추어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 고속성장은 이제 과거의 일이다. 무소불위로 여겨지던 대기업들도 도미노처럼 쓰러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변화는 발전의 과정에서 당연히 나타나는 구조조정이며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정치의 치부가 완전히 드러남으로써 새로운 정치가 자라날 여지가 열릴 수 있다. 경제 또한 약점이 낱낱이 가려진 다음에야 새로운 성장의 계기를 맞을 것이다. 20세기 전반의 대경제학자 요제프 슘페터는 공황을 찬물 샤워에 비유했다. 찬물에 샤워를 하면 잠시 춥긴 하지만 몸이 더 건강해지듯이 위기를 통해 경제가 더욱 건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위기의 엄연한 현실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특히 심각한 것은 익숙했던 것의 상실로 많은 국민들이 혼란과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구태로 일관하는 정치에 식상한 것은 이미 오래고 사회의 어디를 둘러보아도 신명나는 일은 거의 없다. 오죽했으면 야구나 축구 경기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겠는가. 경제의 기초여건이 명백히 개선의 조짐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증권시장은 폭락사태를 거듭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무기력증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투자할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어 보이니까 투자를 꺼린다.
국민들이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방향감각을 회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정치 지도자들이 지금이라도 달라져야 한다.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고 국가목표를 설정하는 책무를 진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극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미국의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도력은 대중이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사회적 목표를 확실히 설정해 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지도자는 자신의 영감에 떠오르는 비전이 벌써 사회의 경험인 양 말하고, 자신의 포부가 마치 진리인 양 행동해야 한다. 이렇게 지도자는 사회의 경험과 자신의 비전 사이의 갭을 메우고 전통과 미래를 연결하는 다리를 놓아야 한다』
비전은 바로 국민들이 신바람이 나서 움직이게 하는 결정적인 추동력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번 신바람이 나면 어지간히 어려운 일도 후딱 해낸다. 『잘 살아보세』 『70년대는 마이 카 마이 홈』이라는 구호에 죽을둥 살둥 일했고 88올림픽도 그렇게 치러냈다. 이처럼 지도자의 비전은 목표를 지향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비전있는 정치 지도력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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