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가을은 노벨상 발표로 시작된다. 올해 노벨 의학상이 노인성 치매의 원인이 되는 물질의 존재를 밝혀낸 생물학자에게 돌아간 것은 현대사회에서 치매가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일깨운 경종의 뜻이 있다.치매노인과 그 가족의 비극을 전하는 얘기는 무수하다. 지난 6월24일자 한국일보 사회면에는 이런 사연이 실렸다.
76세의 김순전 할머니는 12년 전 신장병이 악화돼 자리에 누웠다. 6년 전에는 중풍이 걸렸고, 3년 전부터는 마침내 치매증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 이영래 할아버지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아내를 부축해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을 시키며 포기해선 안된다고 수만번 다짐했다. 그러나 보람도 없이 올들어 병세는 급격히 악화됐다. 할머니는 자기 대소변까지 받아 내게 될 남편의 일이 걱정돼 참을 수 없었다.
김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아내의 쾌유를 빌러 새벽기도를 간 사이 눈물로 유서를 쓰고 있었다. 『하나님,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여보, 간병하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살림하랴 간병하랴 이러다간 당신이 먼저 쓰러지겠소…』
할머니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의 약속을 저버린 죄를 빌며 사랑하는 남편을 남겨 둔 채 12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를 보면 작년말 현재 60세 이상 치매노인이 14만5,000명이고, 2020년에는 이 숫자가 약 40만명으로 늘게 된다. 그때쯤의 60세 이상 추정인구가 1,000만이니 25명중 1명은 치매노인이 되는 셈이다.
미국사람도 400여만명이 치매를 앓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레이건 전 대통령이다. 뉴욕 타임스가 얼마전 그의 근황을 보도했다.
그의 밑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조지 슐츠가 얼마전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레이건 자택을 방문했다. 그는 부인 낸시가 동석한 자리에서 레이건과 1시간쯤 차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다 돌아갔다. 그날 밤 슐츠는 낸시에게서 충격적인 전화를 받았다.
잡담도중 레이건이 간호사와 함께 잠시 자리를 떴는데, 자리로 돌아오면서 그 간호사에게 레이건이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낸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지. 저사람 아주 유명한 사람이야』
레이건은 대통령 취임 때 70세였다. 재임 8년동안 나태하고 부주의한 습성이 있기는 했지만 직무수행에 장애가 될 만한 정신적 결함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백악관 주치의들은 증언한다. 그러나 레이건 선대에 치매병력이 있고, 84년 재선을 전후해서는 희미한 실어증이 자주 나타났었다는 사실이 요즘 밝혀져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만약에 대통령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치매에 걸려 국정에 결정적인 오류가 발생한다면 그건 보통 큰 일이 아니다. 덩샤오핑(등소평)은 늘 그 위험을 경계했다. 그는 92년 마지막으로 모든 공직에서 스스로 물러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어코 퇴임한 것은 노인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 함이다』
중국이 최근 정치국상무위원 취임연령을 70세 이하로 제한한 것도 같은 의미다. 차오스(교석) 전인대상무위원장이 이 규정에 걸려 탈락했으니, 장쩌민(강택민) 주석도 5년후 전당대회 때는 퇴임해야 한다. 집권세력의 세대교체를 제도화한 것이다. 국정을 국민과의 약속으로 알고, 그 직무의 건강한 수행방안을 찾아낸 중국지도자들의 진지한 자세가 돋보인다.
지난 4일 워싱턴에서는 개신교 신자 백만인집회가 열렸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Promise Keepers)」이라는 이름의 이 대집회는 가정과 사회와 신에 대한 청교도적 책임을 다짐하는 도덕재무장운동이다. 사회정의는 약속을 지키는 일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다.
결전을 앞둔 우리 대선주자들이 이 가을에 다짐하는 결단은 무엇인가. 건강이나 나이 탓에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그들에게 있는 것일까. 누가 약속을 우습게 아는가를 가리는 일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국민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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