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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관원과 벌인 충효논쟁(최부의 표해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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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관원과 벌인 충효논쟁(최부의 표해록:5)

입력
1997.10.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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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위해 효를 희생함이 마땅” 다그침에 효를 못하고 어찌 충을…” 맞받아쳐/건도소의 이름난 선비 장푸조차도 과거급제 증표 보여주자 머리 조아려『머나 먼 구중궁궐 님 생각 간절하고 / 흰 구름 천리 밖 어버이 그리워라 / 아직도 충효를 다 하지 못했으니 / 내 어찌 나그네로 끝날 수 있겠소(자전구중억성군 / 백운천리련쌍친 / 차신유미전충효 / 불인감위방외인)』

최부가 제주도에서 임금과 부모를 그리며 지은 시로 공간의 원근법을 심상의 원근법으로 도치시킨 명시다. 충과 효를 아우른 내용이 시공을 뛰어넘는다. 미구에 닥칠 역경을 미리 예측이나 한 듯한 시의 내용처럼 최부는 생사를 모르는 표류길에 휩쓸리게 되고 급기야는 중국에서 충효논쟁에 휘말린다.

충효논쟁은 타오주수어(도저소) 파총관 류저(유택)의 속관 쉐민(설민)이 촉발한다. 최부가 중국에서 겪은 유일한 사상검증이요, 이데올로기 논쟁이었다. 당시 유교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변방의 관리가 제기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쉐민은 최부에게 『신하된 자는 나라를 위해 집을 잊어야 하오. 당신은 나랏일로 여기에 표착됐으니 충을 위해 효를 희생해야 하지 않겠소(이효작충)』라고 다그쳤다. 허를 찔린 최부는 맞섰다.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찾소. 어버이에게 효를 못다 한 사람이 임금에게 충성했다는 말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소』

불꽃 튀는 두 사람의 문답은 마치 중세 유럽의 종교법정에서 벌어졌던 이단심판 장면을 방불케 한다. 쉐민은 충성우위론, 최부는 충효동질론이다. 현상학적으로는 쉐민의 주장이 옳으나 본질적으로는 최부의 말이 맞다. 「효」는 혈연현상이라 선발이고 「충」은 정치현상이라 후발에 속한다. 충은 효를 의제화한 가치이므로 효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나 국가권력이 강해지면서 효를 압도하게 된 것이다. 한 바탕 설전이 끝난 다음 쉐민은 말을 바꿔 조선국왕의 이름을 물었다. 충효론에 이어 국가론을 제기한 셈이다. 『신하 된 자가 어찌 국왕의 휘를 경솔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소』(최부), 『나라밖에 있으니 괜찮지 않겠소』(쉐민), 『어디에 있은들 나는 조선의 신하가 아니란 말이오? 신하 된 자가 멀리 나라 밖에 있다 해서 행동을 달리하며 말을 바꾸겠소? 그같은 짓은 하지 못하오』(최부)

류저의 공무집행은 공정하고 신속했다. 그러나 그도 벼슬아치인지라 보신상의 이유로 최부가 도적에게 피해 본 사실을 보고서에서 삭제했다. 일행은 젠타오수어(건도소), 닝하이(녕해)현, 닝보(녕파)부를 경유해 샤오싱(소흥)부의 비왜도지휘관(비왜도지휘관·정3품) 황중(황종)에 인계된다.

샤오싱에 도착하기 전 최부는 젠타오수어에 머무른다. 이 고장 선비 장푸(장보)는 최부에게 「병오년등과록(1486년 과거합격증)」을 과시하려고 집에 초대한다. 집앞, 용틀임한 돌기둥에 2층 3간으로 된 단청도 찬란한 정문에는 「병오과장보지가」라고 씌어 있었다. 최부도 질세라 휴대한 「문과중시소록」을 보여주자 장푸는 납짝 승복한다. 지방지를 보니 장푸는 과연 병오년에 급제했으나 본과보다 한 단계 아래인 향시의 합격자로 「거인」이라 기록됐다. 「거인」은 본과 응시자격이 있으므로 그 특권은 대단했다. 당시 최부가 못 본 장푸의 정문이 또 하나 있다. 젠타오수어 서쪽에 세운 「동남정수(동남쪽의 뛰어난 수재)」 4자의 정문이다. 그만큼 장푸는 이 고장의 자랑이었다.

샤오싱에 도착한 최부 일행은 재심을 받는다. 심리는 4심제도이지만 재심이 사실상 최종심이라 매우 중요한 절차다. 최부는 「단군건국설」을 들어 조선이 중국처럼 오랜 문명과 역사가 있음을 강조했다. 또 제주도와 중국과의 거리를 질문받자, 수만리나 된다고 거짓 진술을 했다. 공인으로서 국토의 기밀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샤오싱은 수향으로 이름난 도시. 최부가 다녀 간 약 400년 뒤 샤오싱은 천재작가를 배출했다. 바로 루쉰(노신)이다. 수로에는 루쉰이 묘사한 우펑촨(오봉선)이 아직도 떠 있다.

우리는 최부가 언급한 서성 왕시즈(왕희지)의 유적 란팅(란정)을 찾았다. 대나무문 현판에 고졸하고 우아한 필치로 쓰여진 「낙지」의 두 글자, 바로 광개토왕 비문에서 집자한 것이다. 중국 서법의 성지에서 우리의 글씨가 우뚝했다. 가슴벅찬 발견이었다.<박태근 관동대 교수(중국 샤오싱·소흥에서)>

◎재심장에서 떨친 조선의 기개/“단군께서는 요임금과 나란히 건국/인물로는 김유신·최치원·정몽주…”

최부 일행은 윤 2월4일 샤오싱(소흥)부에서 치밀한 재심을 받았다. 비왜서도지휘첨사 총독 황중(황종)과 순시해도 부사 우원위안(오문원), 포정사 분수우참의 천탄(진담)이 앉아 있는 징청당에는 무기 갑옷 투구 태 장 등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한 분위기였다.

―공술서와 지금의 말이 왜 다른가.

『파총관이 물었던 것은 다만 표류와 표착에 대한 것 뿐이었소. 포정삼사에서 자세히 묻기에 도적만난 사실 등을 덧붙여 공술한 것 뿐이오』

―당신들을 왜인으로 여겨 체포하여 죽이려고 하였소. 조선사람이라면 당신네 나라의 연혁과 도읍 산천 인물 풍속 예법 상제 호구 병제 전부 관상제도 등을 자세히 써서 제출하시오.

『단군께서는 중국의 요임금과 나란히 나라를 세우고 조선이라 하였는데 평양에 도읍한지가 천여년이 넘었소…. 서북지방을 점거한 고구려는 요동과 평양에 도읍하였소…. 나라이름이 조선으로 바뀌어 한양에 도읍한지 이제 백년이 되어 가오. 인물로 말하자면 신라의 김유신 김양 최치원 설총, 백제의 계백, 고구려의 을지문덕, 고려의 최충 강감찬 조충 김취려 우탁 정몽주 등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소. 호구 병제 등에 대해서는 유신인지라 잘 모르오』

―추쇄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제주는 바다 가운데 있는데 뱃길이 험한데다 매우 멀어 죄를 짓고는 그 곳으로 도망을 가는 자들이 많소. 그들을 찾아내 데리고 오는 일을 말하오』

―당신네 나라와 우리나라의 거리는 얼마나 되오.

『듣자니, 우리나라 서울에서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을 지나 북경에 도착하는 데는 3천9백여리 쯤 된다고 하오』

―당신의 시를 보니 당신은 이 지방산천을 어찌 그리도 자세히 알고 계시오. 이 지방 사람이 일러준 것이오.

『사고무친이며 말조차 통하지 않는데 누구와 더불어 얘기할 수 있었겠소. 전에 중국지도를 본 일이 있기에 기억을 되살린 것 뿐이오』

◎표해록초/“나는 두번 과거급제… 봉록만 200석”

윤 1월24일: 천암리를 지나 젠타오수어(건도소)에 도착했다. 어떤 사람이 등과소록을 꺼내서 방록 중에 있는 장푸(장보)라는 두 글자를 가리키더니 『나의 성명이오. 당신네 나라에서도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존경하고 있소?』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과거에 급제하면 벼슬과 봉록을 주고 마을의 어귀와 대문에 깃발을 세우며 명함에도 「진사 무슨과에 몇 등으로 합격한 사람」이라고 쓴다』고 말했다. 나도 조금은 과장해서 말했다. 『나는 일찍이 두 번이나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한 해 봉록으로 받는 쌀이 2백석이나 되고 대문은 3층이나 되오. 당신도 내게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소… 여기 문과 중시소록이 있소』하며 보여주었다. 장푸는 나의 직함과 성명을 보고 무릎을 꿇더니 『나는 근처에도 못 가겠소』하는 것이었다.

1월25일: 젠타오수어 천호 이앙 등이 부두까지 나와서 우리를 전송해주었다. 나는 『우리는 명나라 황제 역시 예의로 대하고 있소. 나는 조선의 신하요 장군은 황제의 신하이외다. 그런즉 장군이 나를 지극히 환대해 주는 것을 어찌 충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했다.<최기홍 역 「표해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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