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공방이 치열하다. 신한국당의 선제공격은 상대방 치부를 공개, 지지율 열세를 만회해보자는 의도이다. 법 위반사항과 의혹을 바로 잡겠다는 뜻은 부차적이다. 잠시 당황한 듯한 국민회의의 대응은 종전보다 고차원이다.이같은 사태는 언제 터지냐는 시간문제였을 뿐 충분히 예견돼왔다. 폭로전이라는 게 어차피 거쳐야 할 과정일 바에야 기왕이면 한걸음 물러서서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눈살을 찌푸려본들 심신에 하등 득이 되지 못한다. 대통령후보에 대한 정상적 검증체계나 과정이 빈약한 우리 여건에선 이같은 폭로전이 당초 의도야 어떻든 일종의 검증과정이 될 수도 있다.
대신에 남김없이, 숨김없이 해보자. 폭로전에 신물이 난다고 해서 그냥 적당히 남기고 적당히 숨겨서 지나가는 식만은 금물이다. 「정치적으로 해결한다」는 말은 정치인들이 일반국민들과는 다른 치외법권 지역에 있음을 뜻한다. 법을 어긴 혐의와 의혹이 있으면 당연히 법적 조사를 받아야 마땅하지, 어떻게 자기들끼리의 협상에 의해 적당히 넘어간단 말인가. 이래선 정치가 법의 한계를 넘어서거나 어긴 자들의 게임일 뿐이라는 낙인을 벗지 못한다.
폭로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보의 불균형이다. 여권이 돋보기를 가지고 상대방을 뒤질 때 야권은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상대방을 살피는 격이다. 여기에 「내부고발자」의 역할이 중요하게 떠오른다. 이런 내부고발자야말로 시대를 진전시키는 고행자다. 또 권력기관의 개입여부도 꼭 짚을 대목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봉합이 떠오른다. 맞공격이니, 추가공격이니 엄포는 요란한데 계산적으로 한두 개씩 터진다. 언제라도 각자 계산에 따라 미봉, 마치 후반전이 없는 축구가 되려는 형국이다. 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드는 「경제 인질론」도 등장하는데 미안한 얘기지만 바로 이러한 구태의 봉합이 경제를 어렵고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탈리아 군에 대항하는 북아프리카 민족주의자의 삶을 담은 영화 「사막의 라이온」은 주인공이 체포돼 교수형을 당하는데 어린 소년이 그의 안경을 주워 어디론가 떠나는 게 마지막 장면이다. 안경은 그의 저항정신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상징이다. 우리 정치인들은 무얼 남길 것인가. 헌신적 삶의 체취가 담긴 안경은 커녕 비자금을 조성하고 말을 바꾸는 기술, 법망을 피하는 법, 마술에 가까운 변신술 등이 전수될까 염려된다. 구습과 악폐를 전수하느니 기회가 닿는대로 자꾸 털어버리는 게 차라리 낫다. 폭로전이라도 좋다. 자신의 과거가 다 드러난 당선자는 과거를 숨긴 경우에 비해서 조금이라도 더 낮은 자세로 나라를 꾸려갈 것이다. 덜 고압적이고 덜 권위적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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