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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연극제/이혜경 연극평론가(전문가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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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연극제/이혜경 연극평론가(전문가 진단)

입력
1997.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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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한계 뛰어넘는 인류적 메시지 전달/모든 문화격차 극복 ‘교감의 장’ 확인 감동많은 이들의 기대와 관심 속에서 시작된 세계연극제가 이제 종반에 접어들었다. 아시아에서는 처음 열리는 세계 규모의 공연예술 축제인 이번 행사에는 25개국에서 들고 온 40여편의 작품과 한국의 공연예술인들이 올린 60여편의 연극 무용 악극 등 모두 110여편이 참여했다.

45일간 서울과 과천에서 공연된 이 작품들은 연극인들은 물론이고 일반 관객 모두에게 모처럼 다른 문화권의 공연예술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풍성한 만찬과도 같았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축하할 일은 행사의 규모나 역사적 의의보다도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며 한 공간에서 만날 수 밖에 없는 연극적 만남의 한계와 도전에 있다.

『연극인은 영원한 촌놈』이라는 말이 있다. 연극은 여러가지 이유로 문화간의 교류가 가장 더디게 일어나는 분야라는 사실을 자조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배우와 관객이 일정한 시간에 한 공간 안에서 만나야 한다는 점과 한 문화의 결정체인 언어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연극은 자신의 문화 안에 가장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예술이다.

더욱이 대부분의 예술이 최첨단의 기술 덕분에 대량으로 복제되어 경계없이 유통되는 이 시대에 연극은 인간의 몸을 매개로 하면서 수공업적 작업 형태로 집단이 만들어내는 종합예술이라는 점 때문에 멸종 위기에 처한 구시대 유물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연극인들 사이에서도 종종 제기되곤 한다.

이번 연극제는 바로 위와 같은 한계를 실감하면서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문화권과의 연극적 만남이 얼마나 소중하고 도전적일 수 있는가를 일깨우는 교감의 장이기도 했다.

문화마다 서로 다른 세계관과 역사적 경험, 서로 다른 표현방법과 연극관을 한자리에 모으고 바로 그 「다름」을 들여다 보면서 그 「다름」 때문에 절망하는가 하면, 또한 각기 다른 경험 밑바닥에 들어있는 「같음」때문에 상대가 더욱 가깝게 느껴지고 소중해지는 아이러니를 몸으로 느끼는 일은 연극 공연장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감동이다.

연극에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는 부분은 무엇보다도 언어이다. 이번에 참여한 공연들은 의사소통 효과를 반감하는 언어의 비중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연극적 기법들을 사용했다.

캐나다의 「약속의 땅」의 경우는 아예 언어없이 움직임으로만 내용을 전달했고 일본의 「명의 야부하라」는 한국어 자막을 설치하고 간간이 한국어를 집어넣어서 극 내용을 전할 뿐만 아니라 관객과의 일치감을 증폭시켰다.

미국 라마마극단과 한국 동랑앙상블이 공동 제작한 「트로이의 여인들」은 고대 그리스어를 바탕으로 한 가사에 여러 문화권의 가락과 리듬으로 곡을 붙여서 배우와 관객들이 혼연일체가 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그런가 하면 베네수엘라의 「아무도 대령에게 연락하지 않는다」와 루마니아의 「페드라」의 경우는 언어 장애를 극복하려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극의 내용과 비장함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뛰어난 무대였다. 그러고 보면 연극적 감동을 전달하는 데에는 또 다른 차원의 언어가 있다는 말이다.

그와 같은 무대 언어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는 이 공연들이 전하는 전쟁의 고통, 아들을 잃은 슬픔과 죽음의 그림자, 파멸로 치닫는 욕정 등의 보편적인 주제이다. 그리고 그 주제가, 자기의 연륜에 맞는 역할을 진실하게 전하는 배우들의 모습과 아름답고 창의적인 연극 미학에 담겨서 전달될 때 무대 언어의 의미와 효과는 날마다 새롭게 빚어진다.

연극제와 함께 열린 국제 심포지엄에 참여한 연극기호학자 안 위베스펠트는 70평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나라 작품을 볼 때 언어는 못 알아들어도 대사는 알아듣는 경우가 있다. 극작술이 선명하고 배우의 연기가 훌륭할 때이다』

이번 세계연극제는 보편성을 지닌 메시지가 진실되게 전달될 때 언어를 비롯한 모든 문화적 격차는 극복될 뿐만 아니라 감동까지 더할 수 있다는 인간 의사소통의 진리가 다시 한번 확인되는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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