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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현실과 소설/박승평 수석논설위원(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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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현실과 소설/박승평 수석논설위원(메아리)

입력
1997.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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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픽션(Fiction)이다. 작자가 보는 현실을 구성적으로 서술한 창조적 이야기라는 게 보편적인 소설의 정의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창작일망정 허구에서 출발한 소설이 사람들에게 위안과 재미를 주고 가상의 현실을 통해 오히려 실제적 현실을 비판하는가 하면 더러는 불후의 명작으로 시간을 뛰어넘는 감동마저 주는 것은 왜일까.학계에서는 그 이유로 소설의 기능에서 인간성에 대한 옹호나 탐구요소가 두드러지고 현실에 대한 올바른 통찰이나 감성의 환기 등이 요구되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이런 학문적 풀이를 떠나서도 온갖 소설이 존재한다. 군사정권말기 민간민주정권의 태동을 앞두고 한때 인구에 회자되었던 「최후의 계엄령」이나 「대권」(한국일보 석간연재)과 같은 가상의 정치풍자소설이 작가 고원정씨에 의해 창작된 바도 있었다. 당시 그 소설들로 인기가 높아졌던 고씨는 독자들에게 소설내용의 실현가능성에 관심을 갖지 말고 담긴 메시지만 읽기를 당부하고 소설과 같은 결말의 현실화를 오히려 경계했었다.

그런데 최근 기아사태의 혼란과 무대책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이씨춘추」라는 가상의 기업풍자소설이 나와 화제를 타고 있는 모양이다.

과거 「최후의 계엄령」이 정치적 민주화 장래에 대한 사회적 불안감을 깔고 나왔던 것처럼 이번 소설도 기아사태로 표출된 경제정의 및 재벌의 도덕성에 대한 의혹과 경제앞날에 대한 불안심리를 배경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 성격이 유사하다. 다만 대상이 정치분야에서 기업세계의 탐욕과 비정함쪽으로 옮겨갔고 저자도 고씨와 같은 전업작가가 아니라 서울에 지역구를 둔 현직의 여당 국회의원이면서 기아그룹의 고위직을 지낸 전문경영인출신 이신행씨라는 점이 구별되면서 오히려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언론에 보도된 「이씨춘추」의 내용은 물론 가상의 세계를 다룬 것이다. 오성그룹 이근수 회장이 무리하게 오성자동차를 허가받은 뒤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야자동차를 인수, 국내 제2위의 자동차 메이커로 도약하려 정치인 및 관료와 야합하고 그룹 산하의 언론마저 동원해 벌이는 음모와 기업 흡수·합병작전의 전말을 다룬 것이다.

이 소설에서 오성그룹과 이근수 회장이 누구이며 가야자동차가 어느 기업을 빗대어 지목하고 있는지는 누구에게라도 불문가지이다. 저자가 그 소설 1부의 후기에서 『우리 현대사가 일제와 독재라는 부당한 지배세력에 대한 투쟁의 과정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또 다른 부당한 지배세력―금융과 언론과 조직을 장악한 부도덕한 재벌에 대한 투쟁차례』라고 주장한 것도 이 소설의 간행 목적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라 할 것이다.

결국은 이처럼 매우 의도적인 「픽션」이 왜 소설의 이름으로 출간되지 않을 수 없는지에 생각이 미친다. 더구나 국회라는 제도적 장치마저 면책특권으로 이용할 길이 보장되어 있다는 현직 국회의원이 바로 저자가 아닌가. 가상현실을 엮다 보면 자칫 사실 오도나 명예훼손의 가능성도 없지 않을 텐데 하는 노파심마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 의문과 걱정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엊그제부터 시작된 국회의 기아문제 국정감사장에서의 한심스런 온갖 해프닝과 무대책으로 날마다 날개없이 추락해 가는 기아협력업체들의 딱한 현실에서 두루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부도유예 77일간 정부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문민경제는 부도이다』는 여당도 가세한 의원들의 질타에도 『개별기업 문제일 뿐 정부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우리 입장이란 없다』 『경영부실 등 모든 원인은 기아탓』이라며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는 답변만 정부측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아도 여당 전당대회와 이번 국정감사 시작을 코앞에 두고 재벌총수 등 기업인들에 대한 대통령의 특사마저 단행된 시점인 것이다.

정권은 주권자로부터 수임받은 국정수행의 책임을 끝까지 져야 한다. 정부도 할 일은 분명히 해야 한다. 나라 경제가 부도인데 관여도 않고 입장도 없대서야 국민들이나 기업들은 누구에게 내놓고 해결을 호소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결국은 픽션이라는 이름을 빌려서라도 「이씨춘추」의 세계를 풍자하게 된다. 현실의 문제가 가상소설처럼 펼쳐질 수 있는 사회는 결코 오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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