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가 출구 없는 불황에 허덕이는데도 책들은 쏟아져 나온다. 저 책들 가운데 과연 몇이나 시간의 경계를 넘어 고전의 반열에 오를 것인가? 일찍이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지어 바치는 표문에서, 이 책이 간장병 종이마개로 사용되지 않기를 기원했다. 그러고 보면 나 어렸을 때만 해도 못쓰는 책을 찢어 간장병 기름병 등등의 종이마개로 썼던 기억이 난다. 까마득한 고려시대에도 그랬다고 하니 절로 미소를 금치 못하겠다.「삼국사기」는 비판받아 마땅한 부분도 적지 않지만 뭐라고 해도 불후의 고전이다. 이런 고전을 저술하고도 후대의 평가에 자신을 낮추는 옛 선비의 엄정한 마음! 아무렇게나 글 쓰고 마구잡이 책 내는 일이 횡행하는 최근의 부박한 출판세태가 더욱 부끄러워진다. 옛날에는 종이마개일망정 못쓰는 책도 쓰임새나 있었지, 요사이는 마개기술의 진보로 그 용도마저 없어져, 파지로 처분될 수 밖에 없는 책의 운명이 안쓰러울 뿐이다. 아니 나무가 불쌍하다. 뉴욕타임스 일요판을 제작할 때마다 지구의 허파, 아마존 원시림이 한 뭉텅이씩 사라진다는데, 저 수많은 엉터리 책의 출판을 위해 마구 베어지는 나무들은 무릇 얼마인가.
문학의 위기론에도 불구하고 문학 출판도 홍수를 이루고 있다. 국가경쟁력이란 말이 정치권에서 귀 따갑게 들려오더니, 문단 일각에서도 그에 화답하듯 우리도 이제는 경쟁력 있는 작품을 내놓아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는 철없는 주장도 나온 바 있다. 외설을 문학이라고 우기는가 하면, 외국소설 베끼기가 혼성모방이라는 이름 아래 버젓이 옹호되고, 통속소설이 본격소설로 둔갑하는 마술도 판을 벌인다. 진작에 시가 비밀결사원 사이에 주고 받는 고급의 암호로 퇴각한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과 달리 시집이 대중적으로 팔리는 나라답게 시단도 다채롭다. 기초가 여물지 않은 언어감각이 새로운 수사학으로 칭송되고, 범상한 경구가 시적 예지로 찬양받고, 낙서 같은 감정노출증이 인간 정신의 깊숙한 열림으로 화려한 조명에 부각된다. 「종족의 방언(모국어)」의 최후의 수호자라는 시인의 명예를 팽개치고 시인이 시정배의 모국어 학대를 따라잡기 바쁘다.
물론 최근 문학이 다 이처럼 낮은 취미에 물들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90년대 문학의 최량의 성과들은 80년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모국어의 암흑면을 개척하면서 리얼리티에 직핍해간 우리 문학의 전통을 미쁘게 계승하고 있다. 사실 어느 시대에나 통속문학은 존재해왔다. 그럼에도 최근의 현상은 우려할만한 구석이 없지 않다. 번연히 통속인데도 통속이 아닌 체 나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는 통속과 본격의 구분 자체를 거부한다. 이러한 거부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양극화 현상은 한 사회의 문화적 불건강을 가늠하는 중요지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처럼 통속이 본격의 영역마저 통속화하려는 것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불건강한 구분을 진정으로 넘어서는 작업과는 거의 무관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도대체 문학하는 일의 진지함 자체를 희화화하는 이런 방만한 경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정명환 선생은 20년대에는 친카프(KAPF)적이었다가 카프 쇠퇴의 기미가 포착된 30년대에는 성과 자연으로 내달린 이효석의 급변을 분석하면서, 카프와 이효석의 관계를 시어머니와 약삭빠른 며느리에 비유한 바 있다(「위장된 순응주의(상)」 「창작과 비평」 68년 겨울호). 이는 90년대 문학의 한 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90년대 문인들의 시어머니는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 속에 너무나 진지했던 80년대의 급진문학이었다. 80년대 문학의 해체는 90년대 며느리문인들에게 고대하고 고대하던 시어머니의 사망이라는 복음노릇을 한 셈이다. 그런데 80년대의 급진문학이 정치에 대한 문학의 종속이라는 형태로 문학의 위기를 불러왔다면, 90년대적 문학경향은 정치로부터의 문학의 탈각을 통해 거꾸로 문학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우려되는 점은 80년대에 대한 부정이 한국문학사의 정전 전체에 대한 의도적 무관심으로 연장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 문단에 나타난 신인류처럼 자유롭다.
나는 우리의 간난한 역사적 도정에서 인간 구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사유하면서 진정한 문학적 위엄을 지키고자 고투하는 과정 속에서 순정한 언어의 숲을 이룩한 우리 문학의 고전들을 비판적으로 학습하는 일이 90년대 문학의 갱신에 중요한 디딤돌의 하나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90년대 문학이여, 『비로소 충만한 이 한국문학사를 웃지 마라』(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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