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 9일만에 다다른 외딴 섬/중국 도적무리에 몽땅 약탈당하고 육지마을선 주민들에 뭇매최부 일행은 추풍낙엽처럼 망망대해의 파도에 휩쓸려 끝모를 표류를 계속했다. 너나 할 것없이 죽음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표류 9일째, 생사의 갈림길에서 오락가락하던 일행에게 삶의 의지를 되살리는 징조가 나타났다. 1488년 윤 1월11일. 두 길이 넘는 석벽이 둘러쳐진 섬 하나가 눈앞에 들어왔다. 키를 잡은 권산은 울부짖으며 죽을 힘을 다해 배를 저었다. 배를 대기 힘들 정도의 바위섬에는 인적은 없었으나 골짜기에는 물이 있었다. 생명수였다. 실같은 생존의 희망이 피어올랐다. 앞다퉈 물을 마시며 밥을 지으려 하는 일행에게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갑자기 배부르게 먹으면 죽음을 면치 못하네. 먼저 미음을 끓여 마시거나 죽을 쑤어 먹게』
기쁨도 잠시, 비바람을 피할 곳이 없는 이 섬도 오래 머물 장소는 못되었다. 다시 배를 저어나간 일행은 이튿날 비로소 사람을 만난다. 큰 섬이 보이는가하자 중선 두 척이 최부의 배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나 이것이 표류의 고난보다 더 혹독한 시련의 시작일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으랴.
최부는 말이 통하지 않는 그들에게 글로써 표류하고 있는 사정을 설명하고 여기가 어느 나라 땅인지 물었다. 회답이 왔다. 『여기는 대당국 저장(절강) 닝보(녕파)부 지방』이라는 것이었다. 현재 닝보 앞바다의 1,239개 섬이 몰려 있는 저우산(주산)군도의 어느 한 섬에 닿은 것이었다. 이 중의 하나인 푸투오(보타)섬은 관음보살의 성지로 중국불교 4대 순례지의 하나.
최부 일행은 중국인의 말대로 바닷가 초가집 아래쪽에 배를 매어두고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밤 11시쯤 되었을까. 아까 만났던 중국인 일행의 두목 린따(림대)가 수하 20여명과 함께 창과 작두를 들고 들이닥쳤다. 관음불을 자칭하는 그들은 최부 일행에게 남아 있는 물건을 몽땅 약탈해갔다.
마지막으로 인신과 마패마저 빼앗으려하자 이것에는 최부도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들은 칼을 들어 최부의 목을 베려 덤볐다. 놀란 김중과 최거이산이 무릎꿇고 싹싹 빌자 그들도 충정어린 선비의 의연한 기개에 눌렸던지 마지못한채 배의 돛과 노를 부러뜨린 다음 사라졌다. 삶의 희망을 잡는 순간 처음 만난 무리가 도적이었던 것이다.
다시 바다로 내쫓긴 최부 일행의 배는 강한 서북풍에 정처없이 떠밀려갔다. 도적떼를 만난 뒤로 최부 일행의 삶의 의지는 오히려 그나마 엷어져 갔다. 배는 온통 구멍이 나고 배안으로 밀려오는 물은 아무리 퍼내도 줄지 않았다. 그러기 닷새만인 윤 1월16일. 일행은 남으로 남으로 표류해 마침내 육지에 닿았다. 타이저우(태주)부 린하이(림해)현. 6척의 배가 최부의 배를 포위하고 후추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있을 리 없는 일, 그들은 최부의 배를 다시 유린했다.
최부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빗속을 뚫고 육지로 상륙해 달아났다. 최부는 이에 앞서 일행에게 『해적에게 당했으나 주민을 만날 경우에는 위계질서와 예의를 지키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처음 만난 육지의 마을이 센옌리(선암리)였던 것이다. 이곳 해안일대는 왜구의 피해가 심한 곳이었다. 왜구로 오해를 당한 최부 일행은 마을주민들에게 구타당하고 끌려다니며 말할 수 없는 수모와 학대를 받았다.
지난 5월18일 최부의 여로를 답사하기 위해 처음으로 린하이 땅을 밟았다.
지금 이 마을 이름은 산먼(삼문)현 리푸(이포)진 센옌(선암)촌. 주민들에게 혹시나 하고 최부가 묵었다는 절을 아는가 하고 물어보았다. 주민들은 『절이 있다』며 마을 뒷길로 안내했다. 하지만 우리는 실망했다. 옛모습 그대로의 절을 보리라 생각했던 기대와는 달리 절은 새로 지은 건물에 「노인정」이란 팻말을 붙이고 있었다. 내부 양쪽에 긴 회랑이 있고 안마당은 100여명이 앉을 정도로 넓었다. 본전에는 얼굴이 쪼개지고 팔다리가 잘린 무수산 신상이 마치 한때 유행했던 홍콩영화의 「강시」처럼 도열해 대낮인데도 소름이 돋았다.
비석이 하나 눈에 띄었다. 「중수선암우민전기」. 절 이름은 「선암우민전」(센옌리를 수호하는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이고 이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었다. 중수시기는 93년. 비문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환호했다. 창건연대는 명을 거쳐 송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최부의 기록은 정확했다. 바로 이 절이 509년 전 최부가 머물렀던 곳이었다.<박태근 관동대 교수(중국 린하이·임해에서)>박태근>
◎태주의 신라방/영파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신라인 대외 활동의 광역성 증명
최부가 표착한 닝보(영파)와 타이저우(태주)는 매우 대조적인 곳으로 마치 「빛과 그림자」와 같다. 닝보는 강남의 대도시 항저우(항주)의 외항으로 일찍부터 번영을 누렸지만, 그 남쪽 지역인 타이저우는 그야말로 시골에 불과했다. 오히려 16세기(명나라)에는 일본 왜구의 침략으로 항왜전쟁의 주전장이 됐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국제교류권에서 소외된 지역이다. 그런데 이 지방의 가장 오래된 지방지인 「가정적성지(1223년, 송나라 때 편찬)」에서 새로운 사실을 찾아냈다.
즉 타이저우에도 「신라방」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7세기에서 10세기 사이 신라와 당의 동아시아 개방체제에서 수 많은 신라인이 중국 각처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신라인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곳이 바로 「신라방」이다. 신라인의 활동범위는 수도 시안(서안)이외에 주로 산둥(산동)반도에서 닝보에 이르는 연안과 대운하 지역이다. 중국기록은 신라인의 다양한 활동을 이모저모 적고 있지만 「신라방」에 관한 기사는 거의 없고 9세기 일본 스님 옌닌(원인)의 「입당구법순례기(입당구법순례기)」만이 「신라방」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덩저우(등주·산둥성)의 적산촌, 추저우(초주·강소성)의 연수현 등이다. 국제항 닝보지역에서도 신라인이 활동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신라인의 기록은 없고 고려인의 기록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타이저우 지역에 신라인이 살았다는 사실은 신라인의 활동공간이 그만큼 확대된 것이다. 이번 중국여행에서 발굴된 기사는 다음과 같다.
『1076년, 북송의 타이저우부(태주부) 황암 현령인 범세문이 현 동쪽 1리되는 곳에 오대(당이 멸망하고 송이 통일하기까지의 분열시기, 907∼960년, 이때 지방의 정권인 오월국이 저장(절강) 일대를 지배)때에 신라인이 살았던 것을 기리기 위해 「신라방(우리나라 정문같은 기념문)」을 세웠다』 그밖에 린하이(림해)현에는 신라상인의 항구였던 「신라섬」, 고려로 가는 요지인 「고려두산」 등이 있었다.
비록 짧은 구절이지만 구체적인 기사로 저장 동남부 지역인 타이저우에도 신라인이 살았다는 것은 신라인의 대외활동의 광역성을 말해준다.
◎표해록초/“인신과 마패는 우리나라의 신표… 그대에겐 소용이 없으니 돌려달라”
윤 1월12일: 『배 안에 있는 물건은 마음대로 가져가도 좋지만, 인신과 마패는 우리나라의 신표다. 가져간다 해도 그대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니 돌려달라』
윤 1월14일: 『천지는 사사로움이 없고 귀신은 침묵하는 것이니 운 복 선 화 음 등은 공평한 것이네. 악인이 미신으로 복을 빈다고 해서 복이 올 줄로 아는가. 선한 사람이 사설에 현혹되지 않고 또 지내서는 안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화가 미치겠는가… 우리 배가 표류되고 물건이 모두 못쓰게 된 것은 바람을 잘못 만난 탓이네…』
윤 1월16일: 그 동안 지났던 바다는 비록 한 바다라고는 하나 물의 성질이나 빛깔이 곳에 따라 달랐다. 제주바다는 짙푸르고 물살이 아주 급한 편이며 바람은 심하지 않으나 이보다 파도가 심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나흘이 지나자 바다는 흰빛을 띠었는데, 이틀을 지나면서 더욱 희어지더니, 다시 하루를 지나니 푸른색으로, 거기서 이틀을 지나니 다시 흰빛으로, 사흘 뒤에는 적색을 띠고 탁하였으며, 하루를 더 지나니 검붉은 색에 탁했다. 흰색에서 푸른색으로 변한 이후에는 바람이 세어도 파도는 그리 심하지 않은 편이었고, 흰색으로 돌아온 뒤에 처음으로 돌섬이 나타났다.
윤 1월17일: 『우리는 지금까지 생사고락을 같이 해 왔으니 부모형제 사이와 다름 없네. 이렇게 서로 도와야만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네. 자네들에게 부탁하네만 재난에 처했을 때 서로 돕고, 밥 한 술이라도 얻으면 나누어 먹고, 아프면 서로 의지하여 한사람의 낙오자도 없어야 할 것이네』<최기홍 역 「표해록」에서>최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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