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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의 중의학(유라시아 장수촌을 찾아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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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의 중의학(유라시아 장수촌을 찾아서:4)

입력
1997.09.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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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맞추기’ 12대째 비방… 환자 줄이어/중국 뤄양 곽씨 정골치료술 전국적 명성84년부터 세계보건기구(WHO)의 요청에 따라 진행된 필자의 여행목적은 구소련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비롯, 네이멍구(내몽고) 몽골 티베트 시안(서안) 우루무치 투루판 칭하이(청해)성 등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의 전통의학 실태를 조사, 현대인의 성인병 관리에 이용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1. 곽씨정골의원의 비방

고산병에 걸려가며 티베트의 라사에도 가 보았고 히말라야 칭장(청장)고원의 설경도 둘러 보았다. 기차는 별로 타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여름에 여행하기에는 좀 고생스러웠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많이 탔으며 가까운 곳은 자동차로도 다녔다. 그러다 보니 시안 둔황(돈황) 뤄양(낙양)같은 곳에도 들러 중국이 자랑하는 중의학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한의학의 현장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60년대 유니세프 주한대표를 지낸 맥베인씨는 중국을 일컬어 「또 하나의 세계」라 했다. 중국은 인구가 13억에 가깝다. 자치구나 성 하나의 인구만 해도 6,000만명씩 되는 곳이 많다. 돌아다니다 보니 중국이 자랑하는 중의학 또한 고장마다 특색이 두드러졌다. 뤄양 시안 둔황같은 황허(황하) 이북에선 아직도 침을 놓고 환약을 많이 쓰고 있었다. 침도 남쪽지방에 비해 퍽 굵고 컸다.

그러나 윈난(운남)성의 쿤밍(곤명) 등 남쪽 지방에서는 침보다는 탕약을 더 선호하고 있었다. 또 말을 많이 키우고 양떼를 따라 유목생활을 하는 북쪽에선 뼈를 잘 맞추는 정골술 내지 정골요법이 잘 발달돼 있었다.

뤄양에서의 일이다. 시내 호텔에 여장을 푼 뒤 중국에서 널리 알려진 정골전문병원을 찾았다. 곽씨정골의원이라는 간판부터 호기심을 유발했다. 쉽게 말해 곽씨 일가의 대대로 내려오는 비방에 따라 뼈를 잘 맞추고 정골하는 전문병원이었다.

외빈 접대실에서 원장과 인사를 나눈 후 말끔한 노신사와 대면했다. 그가 바로 12대째 내려오는 비방을 가진 정골전문가로서, 이른바 노중의였다. 알고보니 70세가 훨씬 넘었으나 혈색도 좋고 퍽 건강해 보였다. 그와 함께 1,000명이 넘는 환자들이 치료받고 있는 입원실도 구경했다.

입원환자의 대부분이 그의 치료에 만족하고 있었다. 먼 고장에서 찾아온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원장은 이 병원의 운명도 멀지 않다고 말했다. 듣고 보니 곽씨 일가의 비방은 큰 아들에게만 전수돼 왔다고 한다. 불행히도 이 노중의는 딸만 5명이라 그가 죽은 후에는 더 이상 곽씨정골의원이란 간판을 붙일 수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식습관/밥은 정한 것만을 먹으며 날로 된 회는 잘게 썰어 먹고 쉰 밥이나 상한 고기는 멀리하고 조리가 안된 음식은 먹지 않는다/때가 아니면 식사를 하지 않고 바르게 안 자른 음식은 들지 않으며 고기를 먹되 과식하지 않는다/오직 술만은 미리 양을 정해놓고 마시지 않되 난리를 피울정도로 과음하지 않는다

2. 중앙아시아 전통의학과 중의학

49년 이후 중의학이 체계화하고 중의를 위한 교육체계도 표준화했으나 아직도 많은 중국인들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방을 쓰는 노중의를 선호한다. 옛말에도 3대째 내려오는 의원이 아닌 사람이 처방해주는 약은 믿을 수 없다고 해서 「의불삼세면 불복기약」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중의학은 과거에 비해 훨씬 표준화·합리화한 상태이다. 중앙아시아의 전통의학 또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점차 중의화해 가는 경향이 있다. 티베트의 장의학이나 위구르족의 유의학은 물론 몽골의 몽의학도 중의화 경향은 비슷했다.

비단길 주변에서 외모가 한족과 다른 소수민족을 꼽는다면 첫째로 위구르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서양사람같이 몸집과 코가 크다. 말을 잘 타고 개방적이며 싫고 좋은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한다. 이들의 고유악기는 한족의 아악에도 많이 쓰였다고 한다.

우루무치에 있는 위구르 전통의학 종합병원에서 일정을 마친 후 신장(신강)의학원을 찾았다. 이 곳은 서양의학을 가르치고 진료하는 종합병원이다. 55년 구소련의 원조로 우루무치 근교 고비사막에 세워진 병원으로 부속병원이 3개나 되는 큰 의과대학이었다.

이 대학의 내과 주임교수는 한족이었다. 그는 이 고장의 소수민족중 시골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위구르족이 가장 오래 산다고 했다. 지체가 높은 당 간부나 공무원, 교수중에는 장수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고 했다. 학교운영에 깊이 관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족이었다. 비록 직급이 학장이나 병원장, 주임교수는 아니지만 실권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도 한족이었다.

중앙아시아에는 수많은 자치구와 자치현, 자치주가 소수민족을 위해 설정돼 있다. 신장이나 네이멍구는 다른 성과 맞먹는 행정단위로서, 몽골족과 위구르족같은 소수민족에게 할당돼 있다. 이들의 수장은 모두 소수민족 출신이다. 칭하이성의 자치현이나 시장(서장)자치구도 비슷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이 고장 사람들의 과반수 내지 3분의 2가량이 다른 고장에서 이주해온 한족으로 대체돼 가고 있었다.

의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몽골에 가면 그 곳의 전통의학을 다루는 몽의원이 있다. 시장자치구에는 티베트 전통의학을 중심으로 환자를 진료하는 장의원이 있고, 신장자치구에는 위구르족의 전통의학으로 치료하는 유의원이 수없이 많다. 이들의 치료법 또한 한족의 중의학과는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이들이 쓰는 치료법의 상당부분은 한족의 중의학에서 유래됐거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중앙아시아는 이미 정치적인 한족화 내지 중국화가 오래 전부터 추진돼 왔고, 이들이 간직해온 고유 전통의학도 중의학에 의해 침식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10년이나 20년 후에는 이런 경향이 더 진행돼 중앙아시아 소수민족의 전통의학과 중의학간의 구분도 어려워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3. 중의학의 배경과 공자의 식양법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중의학도 그 이론체계나 환자의 진료방법이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다. 중국을 가로지르는 황허와 양쯔(양자)강을 중심으로 황허북쪽의 문화권과 황허와 양쯔강 사이의 강준(강회)문화권, 양쯔강 남쪽의 강남문화권으로 나뉘어 중의학은 각기 다른 발전과정을 겪었다.

황제내경의 소문에도 나오는 바와 같이 북쪽은 춥고 거칠며 유목생활을 하기 때문에 침구법이 발달됐고, 남쪽지방은 고온다습한 평야여서 약을 많이 쓸 수 밖에 없다고 했다. 확실히 북쪽으로 갈수록 같은 중의학이지만 경락에 따른 침을 많이 놓는다. 반대로 남쪽에는 약재가 풍부하고 약의 분량도 많았다.

한편 황허와 양쯔강의 중간에 있는 서쪽지방에는 약으로 쓸 수 있는 식물이 꽤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신농본초경이다. 2차대전 이후 새로운 중국정부의 강력한 지원 아래 중의학은 비약을 거듭, 이제는 거의 서양의학과 대등한 입장에 서있다. 이런 중의학의 특징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수당시대의 「제병원후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람의 모든 병을 밖에서 생기는 외인과 안에서 생기는 내인, 그리고 불내외인의 셋으로 나누어 음양오행의 이론을 적용해 파악했다. 특히 인간의 병을 일으키기 쉬운 내인에는 희·노·우·사·비·공·경의 칠정이 있다고 했다. 화를 많이 내면 간이 상하고, 너무 생각이 많으면 비장이 상한다고 했다. 또 슬픔이 지나치면 폐가 상하고, 정도이상으로 두려워해도 콩팥을 상한다고 했다. 오늘날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정신신체의 의학적 병인론과 흡사하다.

침술은 고질적인 만성병이나 통증치료에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많은 서양의학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중의학은 병을 부분이 아닌 전체로 보고 이른바 전인간적인 치료 내지 예방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도 필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12대째 같은 집안의 비방에 따라 정골술을 이어왔다는 곽씨정골의원 노중의의 말이다. 그는 음식에 관한한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식양법을 따르라고 권했다.

실제로 논어의 향편을 보면 공자의 식습관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밥은 정한 것만을 먹으며, 날로 된 회는 잘게 썰어 먹고, 쉰 밥이나 상한 생선과 고기는 멀리하고, 색깔이나 맛이 나쁘고 조리가 안된 음식은 먹지 않는다. 때가 아니면 식사를 하지 않고, 바르게 자르지 않은 음식은 들지 않으며, 고기를 먹되 과식하지 않는다. 오직 술만은 미리 양을 정해놓고 마시지 않되 난리를 피울정도로 과음하지 않는다」고 나온다. 오늘날에도 되새겨 볼 만한 식양법이라 생각된다.<허정 서울대 보건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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