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의 당선 집착하는 대선후보보다 21세기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그릇이 큰 지도자를 보고싶다최근 일본은 하시모토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행정개혁위원회에서 대규모 행정개편안을 발표했다. 전후에 형성된 행정체계를 약 반으로 축소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마련한 것이다. 이 행정개혁안은 내년 3월 일본의 정기국회에 회부되어 준비과정을 거친 다음 2001년 1월부터 실시될 예정으로 되어 있다. 우리의 전광석화와 같은 행정개혁과는 모습이 다르다. 이러한 개혁은 하시모토 내각 출범이후 꾸준한 논의를 거쳐 이루어진 것으로 21세기의 출범과 함께 새로운 일본을 만들려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21세기를 준비하는 이웃나라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묻게 된다. 대선과정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대선후보들에게서 21세기 국가운영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확실한 정견을 제시하는 후보보다는 합종연횡과 권력구조 개편논의에만 빠져 있는 후보들을 보게 된다.
국민적 대통합의 차원에서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는 자신의 정치철학과 신념을 언제나 바꿀 수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번 대선의 특징인 TV토론에서 나타난 후보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런 성격이 더욱 두드러진다. 정당들과 후보들간에 정책적 차별성이 거의 없다. 그저 교과서적인 대답만을 제시할 뿐 뚜렷한 자신의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있다. 정책결정은 선택상황을 강요받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요구를 다 들어줄 것 같이 말한다. 가장 진보적인 사람도 자신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보수적인 인물이라고 하고 보수인 것 같아 물어보면 진보적 성향도 갖고 있다고 대답한다. 색깔을 알 수 없고 가면을 쓴 연기자와 같다.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논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사회적 의식을 갖게 했다. 경제도 제품생산의 기반기술이나 부품경쟁력을 키우기 보다는 조립가공 중심의 완성품을 만드는데 주력해 왔고 정치도 민주화의 제도적 토대의 구축보다는 독재타도만을 외치는 일에만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민주화를 이룬 다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정체성의 위기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
어느 면에서 보면 김영삼정부의 국정운영의 실패도 조급함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행정개혁, 금융실명제, 역사 바로세우기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일 수 있다. 임기중에 할 수 없는 일은 다음 정권에서 담당할 수 있도록 초석을 놓아주는 것이 보다 필요할 것이다. 대통령에게 권한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도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정책을 운영하는 제도화가 이루어져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권력분산이나 내각제를 논의하는 조바심을 보이기 보다는 정책과정의 민주적 제도화를 먼저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경제가 위기라고 하지만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정치가 더욱 위기인 것처럼 보인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압도하는 사회에서 정치가 단기적 이해에만 관심을 가지면 경제위기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은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TV정치와 여론조사로 나타난 표피적 이미지 관리의 정치는 결국 정치가로 하여금 대중스타처럼 인기유지를 위한 조바심을 낳게 하여 단기적이고 소신없는 정책만을 생산하게 된다.
우리는 이번 대선에서 정견이나 이념의 차별성이 아닌 그저 느낌만으로 지도자를 선택해야 하는가? TV에서 설정해준 청소부 배달부 행상 등의 연기를 누가 제일 잘 했는가를 보고 21세기의 우리 지도자를 선택해야 하는가?
민주화 이후 또 한번 시행착오를 하는 정권을 갖고 싶지는 않다. 후보들에게는 이번 선거가 마지막인 것 같아 보일 지 모르지만 국민들에게는 5년뒤에 대선이 또 있고 잘못된 선택은 국민들의 부담으로 남는다. 당선되기 위한 조바심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후보보다는 21세기의 한국에 대한 자신의 정치철학과 비전을 제시해주는 그릇이 큰 정치지도자를 보고 싶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