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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아로스타미 이란 감독(시네마 뉴웨이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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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아로스타미 이란 감독(시네마 뉴웨이브:3)

입력
1997.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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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소재… 위대한 영화/아이디어·테크닉 탈피 독창적 영상경지 구축/올해 ‘체리향기’로 칸 황금종려상 수상60년대 프랑스의 누벨 바그와 영국의 프리 시네마, 70년대 독일의 뉴저먼 시네마 등을 발굴해온 유럽의 평론가들은 80년대 들어 무척 당혹스러웠다. 더 이상 세계 영화계를 뒤흔들만한 뉴웨이브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구영화는 메시지나 미학적 시도에서 새로움을 보여주지 못하고 침체에 빠진 것이다.

초조해진 평론가들은 제 3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발굴된 남미영화들은 지나치게 정치적이었고, 중국의 천 카이거, 장이모우의 「제5세대」역시 도식적인 미학과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로 「알맹이 없이 과대포장됐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런때, 평론가 앞에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이란의 영화(Iranian Movies)」였다. 그 중에서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90년대 영화의 구세주처럼 평가받고 있다. 88년 낭트와 89년 로카르노 영화제에 낯설기만한 이란영화「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선보이기가 무섭게 유럽의 평론가들은 순식간에 그 마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뒤이어 「숙제」(89년), 「클로즈업」(90년) 등의 연작이 유럽과 미국 캐나다의 영화제에 출품되면서 키아로스타미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한다.

전세계에서 키아로스타미 회고전이 열리는 가운데 94년 칸영화제는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에 대상을 주느라 그의 「올리브 나무사이로」에 상을 안기지 못하는 실수(?)를 범했다. 이를 반성이라도 하듯 올해는 뒤늦게 도착한 그의 신작 「체리향기」에 기다렸다는 듯이 황금종려상을 안겼다. 당대 최고의 거장 장 뤽 고다르와 구로자와 아키라는 『영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찬사를 바쳤다.

이처럼 모든이의 찬사와 열광을 자아내는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의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도대체 이런 소재가 영화가 될 수 있나」, 다시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드는 생각은 「어떻게 그런 이야기로 이처럼 위대한 영화를 만들수 있을까」.

이란북부 지방을 소재로 한 3부작을 살펴보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친구의 공책을 우연히 집에 가지고 온 소년이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저녁 내내 헤맨다는 아주 단순한 소재를 다룬다. 「그리고 삶은 지속된다」는 대지진 때문에 「내 친구…」의 배우들이 죽었을까 걱정돼 그들을 찾아 나서는 감독의 이야기.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다시 「그리고 삶은…」을 찍는 과정에서 피어나는 배우들의 사랑이야기가 줄거리다.

일상의 삶속에 널려 있는 이야기를 건져올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형식으로 완성시킨 그의 영화는 어떤 작품도 도달하지 못한 생생한 사실감을 뿜어낸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어려운 테크닉으로 승부하려고 하는 현대영화에 대한 반성처럼, 그의 영화는 「기법을 초월함으로써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내는」독창적 경지에 이르러 있다.

이슬람교의 독재와 지지리도 가난하게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이란 사회에서 지극히 한정된 소재로 영화적 메타포를 개발해낸 키아로스타미는 영화를 만드는 모든 이를 반성하게 만든다. 『카메라 앞의 모습보다 카메라 뒤의 현실이 더욱 중요하다』는 그는 가공하지 않은 현실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었다. 매너리즘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한, 그는 90년대 영화에 계속해서 신선한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해낼 것이다.<이윤정 기자>

◎내가 본 키아로스타미 영화/반복되는 지그재그길 과거와 현재의 오버랩

산꼭대기의 나무 한 그루, 흙은 누리끼리하다. 주위엔 크고 작은 돌들이 깔려 있고, 초라한 한 움큼의 덤불이 그 위에 너댓 점 찍혀 있다. 황량한 언덕이다. 카메라는 멀찍이 떨어진 채 움직이지 않고 오래 이 광경을 지켜본다. 코케 마을과 푸시케 마을을 이으면서 가로막는 저 언덕의 갈지자 길. 주인공 아메드가 달린다. 카메라가 사라지도록 화면을 바꾸지 않는다. 내러티브에 국한해 말한다면 이건 리얼리즘이라기보다 팝아트 식의 콜라주에 가깝다. 광선이 닿은 면은 일정하지만 관객은 지그재그로 질주하는 감정의 스트로크를 경험한다. 선형의 끝을 구부려 비선형의 원을 만든 이 놀라운 발상에서 우리는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한 비밀을 만난다. 고독한 1일 롱쇼트가 전달하는 느린 속도감의 반복, 초조한 묵상, 우스꽝스런 분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명료한 현실의 언덕에서 출발해 코믹한 모험의 모더니즘으로 달음박질친다. 배경은 하루 낮밤. 이 짧은 시간 안에 감독은 이란의 과거와 현재를 겹쳐 그린다. 친구의 집을 찾아 헤매는 중에 소년이 만난 할아버지는 중요하다. 수미 쌍관하는 두개의 주제적 모티브. 소년의 가장 큰 장애가 된다는 점에서 그는 영화 전편에 펼쳐진 소년의 왕복 달리기와 운을 이룬다. 관객의 웃음보를 마구 찔러대는 할아버지의 느린 걸음은 감독의 도저한 유머다. 지체되는 시간 속에서 노인은 가난한 창틀과 문살의 모양을 가리키며 구세대의 일상과 역사를 엿보게 해준다.

솔직히 나는 「올리브 나무 사이로」가 이 영화만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섬세한 디테일의 운용만큼은 그냥 건너뛸 수 없다. 제라늄 화분이 놓인 베란다, 빛 바랜 지붕, 허물어진 돌담, 늙은 아비와 씩씩한 소녀들, 투박한 이웃 남정네, 가축, 그리고 이 모든 정경에 어울리는 쑥색의 올리브숲은 이란의 위대한 「일상의 역사」를 재구축하려는 예술가의 노련한 배려다. 영화의 결말은 다시 Z자 길이다. 호세인은 테헤레 뒤를 졸졸졸 따라가며 사랑을 고백하고, 카메라는 다시 점잖게 뒤로 빠져 이 모양을 원경으로 담는다. 시간은 정지된다. 화면은 인물의 행위를 포착하지만 운동 이미지 역시 이 안엔 멈춰 있다. 사랑이 없다면 끝이다. 바로 이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한 순간의 끝에 호세인이 뒤돌아 직선으로 마구 달려온다. 직선은 희망이다. 인물들의 걸음을 머뭇거리게 한 꼬불꼬불한 선은 이 희망의 느낌을 증폭시키려고 예비된 것. 이리하여 현실의 시간은 다시 흐른다.<김정룡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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