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더도,덜도말고」의 정치(정달영 칼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더도,덜도말고」의 정치(정달영 칼럼)

입력
1997.09.21 00:00
0 0

추석 연휴가 끝난 첫날, 7이닝을 던져 2안타 맞고 패전투수가 된 박찬호 선수가 소감을 말하고 있는데, 그 표정이 어둡지 않다. 진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경기내용엔 만족한다는 것이다. 던지고 싶은 공을 마음껏 던졌기 때문이라고 한다.물방망이 동료들을 탓할 만도 하지만 그럴 기색은 없다. 넉넉함, 너그러움 따위의 분위기가 그의 패전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 조급함을 감싸주고 있다. 그의 바로 그런 점이, 큰 선수 답다고 할만 하다. 경기는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 것이고, 다소 사변적으로 말한다면, 경우에 따라서 이기는 것 보다 지는 것이 더 다행할 수도 있는 법이다. 그것이 세상 이치이고, 사람의 일이다.

「박찬호가 지니까 밥맛이 없다」는 사회적 무기력증후군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도 없지않으나, 지고도 만족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박찬호 선수에게서는 오히려 희망이 보인다. 그는 이미 정신적으로 이기고 있다. 넉넉함, 너그러움, 남을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이기는」시작이고, 그것들은 또한 우리 사회가 첫걸음을 떼고 있는 민주주의 학습의 가장 기초적인 과목들인 점이 유의할만 하다. 대화와 여유와 관용의 사회질서를 세운 다음에야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민주주의임을 우리는 지금 조금씩 깨우쳐가는 도중이다.

실은 요즘같은, 옛 말투로 중추가절을 가리키는 전통적인 화두는, 단연 「더도 말고 덜도 말고」이다. 계절로서도 이만큼 좋은 철이 다시 없듯이, 그 계절을 표현하는 말로서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만큼 딱 들어맞는 말이 더 이상은 있지 않다. 역시 넉넉하고 너그럽고, 무엇보다 천진 무욕하다. 박찬호 선수의 여유와 어딘가 닮은데가 있다.

구약의 「잠언」에는 「마싸 사람 야케의 아들 아굴의 말」로 기록된 유명한 기도가 나온다. 죽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두가지 간청」인데, 그 첫째는 「허황된 거짓말을 하지않게 해주십시오」이고 두번째가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이다. 그리고 이 두번째 간청에는 몇가지 부연 설명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 살 만큼만」 달라는 것이다. 배가 부른 나머지 교만해져서 배은망덕하거나, 너무 가난한 탓으로 도둑질하여 하느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내용이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와 같은 세계관이고, 그 단호한 도덕률이다. 동서양의 사상을 관통하는 안빈낙도, 가장 인간적인 정신세계를 그 화두들은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민주주의의 기초과목이며 질서이기도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반세기 전에 백범 김구 선생이 갈파한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비슷한 감동을 준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는 명문장으로 기록된 그 글에는 이런 대목이 하이라이트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만 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만 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백범의 이 원망에서 정말로 아름다운 대목은 절제와 품격이다. 「내 임기중에 우리나라를 세계 5대강국의 반열에 들게 하겠다」는 식의 허장성세는 어디에도 없다. 소박한듯 하지만, 그러나 「높은 문화의 힘」을 열망한 그의 통찰과 국가미래에 대한 비전은 지금도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자고나면 경마순위 같은 인기도조사결과가 쏟아지고, 그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대선후보들은 지금 어떤 식견과 비전으로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잔꾀와 허풍으로 우리를 속이고 있는 중인가. 「순위」로 표시되는 「누구」만 있을 뿐 그 내용인 「무엇」은 전혀 보이지 않는 이 대선레이스에서 절제와 품격의 아름다움을 기대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일 뿐인가.

우리가 지금 뽑아야 할 대통령은 1998년에서 2003년까지 두 세기에 걸쳐 국정을 이끄는 지도자다. 「세기적 전환」을 관리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닌 대통령을 이제 석달도 남지않은 기간안에 뽑아내야 한다. 다른 선택이 없다. 여기서 눈 크게 뜨고 마지막까지 지켜내야 할 일이 있다. 「대통령만 되면 된다」는 막가파 식 선거전술, 「누가 정권잡는 것은 죽어도 못본다」식의 판뒤엎기 생각따위를 저지하고 분쇄하는 일이다. 정치의 품격을 높여야 한다. 「더도 덜도 말고」여유와 관용이 앞서는 정치라야 한다.<심의실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