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후진국 면하려면 전업주부의 노고를 인정하고 보상해줄 여성연금 시급하다한국이 「복지후진국」으로 불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작년에 가입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한국은 정부예산 대비 복지비 지출이 가장 낮은 국가이며,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이상의 중상위소득국 중에서도 맨 꼴찌를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선진국들이 사회보장의 기본 프로그램인 「4대 보험」을 완결한 것은 1925년. 한국이 고용보험제의 도입을 계기로 선진국형 복지국가의 시대로 접어 들었다고 선전한 것이 96년이므로 약 70년 뒤진 셈이다. 정부는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신복지구상안을 제안하고 새로운 복지국가의 시대로 돌입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신복지구상안은 장애인, 노령인구, 가택보호자 등 주변집단을 위주로 한 기존의 복지논리를 약간 확대하였을 뿐 「시민적 권리」로서의 복지개념을 도입하는 데에는 대단히 미흡하였다는 것이 공통된 평이다.
더욱이 공동체의 복지기능을 강화한다는 신복지구상안의 기본 방침은 기업의 복지부담을 가중시켜 급기야는 기업경쟁력 제고에 반하는 효과를 초래한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구태여 여러 통계를 댈 것도 없이, 일반 시민들이 실생활에서 그 혜택을 체감할 수 없을 정도라면 우리의 국가복지 수준이 얼마나 미천한가를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복지국가의 위기」를 과대 강조하거나 복지비용이 경제성장을 저해한다는 논리를 근거없이 주장하는 것은 값싼 정부의 최소비용의 전략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는다.
선진국형 복지국가로 진입하려면 기존의 패러다임을 뛰어 넘는 획기적인 개혁조치가 필요하지만, 여성기초연금제의 도입은 무엇보다도 시급한 사안이다. 요즘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는 페미니즘운동에 동조해서도 아니며, 여성이 유권자의 절반을 점하고 있다는 정치적 고려에서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복지국가의 기본 정신이며, 따라서 정부가 강조하는 선진국형 복지국가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민연금은 취업자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기에 대부분의 남성과 취업여성이 주요 수혜자이다. 단순화한다면, 취업 가장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다. 혹자는 전업주부를 포함한 가족연금 개념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일단 가장에게 주어진 연금의 일부분이라도 주부가 그 권리를 주장할 근거는 궁색하다.
그렇다면 약 500만명으로 추산되는 전업주부는 연금혜택에서 완전히 제외되어 있는 셈이다. 여성의 재산권 행사에 관한 약간의 법개정이 있기는 하였지만, 취업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재산권이 인정되지 않는 한국에서 전업주부의 사회적 권리는 극히 제한된다. 인간의 자유는 재산권에 기초한다는 자유주의의 제일 원리를 여기에 적용하면 한국의 전업주부는 존재의 기본 요건을 갖추지 못한 불완전한 집단이 되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이런 명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업주부의 사회적 공헌도이다.
한국만큼 가족이 중시되는 사회도 드물다. 이런 환경에서 주부는 가족의 재생산과 보존은 물론이거니와 정부의 복지기능까지를 담당한다. 자녀들의 자자분한 숙제와 급식보조를 위시하여 방과후의 교양교육, 그리고 남편의 뒷바라지가 모두 주부의 몫이다. 기업과 직장이 그런대로 잘 돌아가는 배경에는 주부의 숨은 봉사가 서려 있다. 월급봉투를 통째로 받는다고 하겠지만, 어디 주부만의 자아실현을 위하여 온전히 쓸 수 있는 몫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한국의 전업주부는 자아실현의 기회를 상실한 단지 존재의 소모자로 방치되어 있다.
여성기초연금은 전업주부의 「존재의 소모」를 보상하는 상여금이자 사회적 권리이다. 이런 이유에서 스웨덴과 독일 등 복지선진국에서는 여성기초연금제가 일찍이 시행되었다. 스웨덴은 산업근로자 평균임금의 약 40%를 지급하고 있으며, 독일은 취업경험에 따라, 그러나 가장이 받는 연금의 일정 부분이 여성의 권리로 인정된다. 여성연금이 이혼을 부추긴다는 주장은 역시 근거없는 독점욕의 소산이다. 오히려 가족 봉사의 의미가 공론화, 가족유대가 증진될 것이다. 여성연금은 큰 비용을 요하지 않는다. 가장의 퇴직금과 연금의 절반을 주부의 권리로 인정하거나 노령연금 형태로 기금마련을 시작하면 족하다. 주부가 「특별한」 국민인 만큼 연금수혜자에서 제외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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