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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무가내 겸손/성석제 소설가(1000자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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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무가내 겸손/성석제 소설가(1000자 춘추)

입력
1997.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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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대학에서 문학을 지망하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런데 진지한 표정의 꽤 잘생긴 학생이 집안의 기대와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 사이의 갈등을 토로하면서 거듭 「저희 집」이라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칭하는 게 아닌가. 나는 자꾸 그 말이 신경쓰여 정작 그 학생의 고민에 대해서는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우리 집이란 말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어머니, 아버지 다음에 배우는 기초적인 낱말이다. 나는 아직 저희 집이란 낱말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어디서 그런 말을 알게 됐는지 물어보니 거기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 집이란 말보다는 저희 집이라고 하는 게 겸손한 표현이 아니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택시 안에서 라디오를 듣는데, 외교문제 전문가라는 분이 나와서, 우리나라를 칭하기를 「저희 나라」로 칭하는 게 아닌가. 나는 또 저희나라라는 말에 신경을 쓰느라, 한반도의 정세변화는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치열한 경쟁과 자기 이익 확보라는 틀 안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의 냉철한 논지에 공감할 틈이 없었다. 저희 나라라는 말은 우리나라 안에서 우리나라 사람끼리 할 말은 결코 아니다. 남의 나라에 가서 그리해서는 오히려 깔보일 뿐이다.

그러고 보니 저희라는 말은 어디에나 넘치고 있었다. 저희 회사, 저희 축구의 수준, 저희 문화계…. 알 만한 사람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은 저마다 저희를 앞세워 겸손을 실천하는 데 앞장 서고 있었다. 태도는 보기 좋아도 그 말들은 들을 때마다 민망했다.

요즘 왜들 이렇게 겸손하지? 그걸 생각하면서 앉아 있는데 어느 보험회사 사원이 전화를 해왔다. 내 이름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는 『네, 성 자, 석 자, 제 자를 쓰시는군요』 하는 게 아닌가. 성과 이름을 한자씩 부르면서 「자」를 붙이는 건 자신의 아버지를 호칭하는 것이니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마흔도 안된 나이에 장성한 아들을 둔 꼴이 돼버렸다. 전혀 고맙지 않았다.<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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