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최되는 세계연극제의 개막식이 8월31일 국립극장에서 열렸다.북의 합주로 시작된 개막식에서는 대회장인 강원용 크리스찬아카데미 이사장의 환영사에 이어 김영삼 대통령의 축하메시지를 송태호 문체부장관이 대독했고 서울시장을 대신한 강덕기부시장의 개막선언과 고건 국무총리의 축사가 있었다. 사이사이에 연극제 참가작으로 다국적 공연인 「리어왕」과 독일 무용단의 「거리에서」의 하이라이트가 소개되고 최청자무용단이 축하공연을 했다. KBS TV가 생중계한 개막식은 이것으로 끝났다.
새삼스럽게 개막식을 지상중계하는 것은 곰곰이 뜯어보면 갸우뚱해지는 것이 있어서다. 개막식을 TV로만 본 사람들은 세계연극제를 준비하고 주관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어 있다. 세계연극의 큰 잔치를 여는 식전에 정작 주인공인 연극인 대표가 등장하지 않은 것이다. 주연 없는 무대다. 연극인은 배우로만 무대에 서는 것이란 말일까. 당연히 정부차원에서 축하도 하고 격려도 해야 하겠지만 연극제는 어디까지나 연극인이 주체요 나머지는 조연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개막식에는 조연들의 행렬뿐, 연극인은 연출자 숨듯 무대뒤에 숨어 버렸다.
TV중계가 끝난 뒤에야 맨 마지막에 주최자인 ITI(국제극예술협회)의 세계본부회장 등 관계자들이 무슨 여흥순서처럼 단상에 올라와 인사를 했다.
ITI세계본부의 현회장이 누구인지 아는 우리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회장이 한국의 연극인 김정옥씨라는 것을 알면 그중 몇 사람이나 놀랄 것인가. 우리 예술인이 국제적인 예술단체의 장이라는 것은 우리 문화의 큰 자부가 아닐 수 없다. 그 자랑스러운 얼굴이 전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객들의 잔치가 된 개막식은 물론 연극인 자신들이 연출한 것이지 누가 시킨 일은 아니다. 손님들을 앞세우고 주인들은 뒷전에 나앉는 겸양은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관에 대한 왜소감을 말한다.
그렇다면 개막식에서 생색을 잔뜩 내고 있는 관이 세계연극제에 얼마만한 기여를 했는가.
연극제의 예산 22억원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이요 그것이 적지않은 선심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예산의 부족으로 꼭 초청해야 할 세계 유수의 극단이나 저명한 연극인이 이번에 서울에 다 모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세계연극제를 계기로 경기도 의왕시를 세계적인 연극도시로 가꾸어 보겠다는 꿈이 좌절된 것이다. 연극이 지나간 자리에 한 도시가 커다란 무대로 남는다는 것은 생산적이고도 환상적인 일이다. 결과는 어디에도 극장 하나 새로 세워진 것이 없다. 올림픽은 스타디움을 남기는데 세계연극제는 남기는 무대가 없다. 의왕시의 경우는 그린벨트 문제 등 행정상의 난관을 핑계대지만 결국은 정부의 의지의 결여였다.
그런데도 연극계로서는 그나마의 보조도 고맙고 정부의 대표가 나타나 주는 것만 해도 황감하다. 그 국궁의 표현이 이번 개막식이다.
비단 세계연극제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화행사들이 대개 그렇다. 관의 장이나 국회의원들이 단상의 상석에 앉아 물주처럼 거드름을 피우고 행사의 주체들은 슬금슬금 그 그늘에서 긴다.
문화는 시종이 아니다. 모셔야 할 주인이 따로 없는 것이 문화다.
비굴한 문화는 문화가 아니다. 아무리 그것이 문화를 살리기 위한 몸부림이라 하더라도 저자세는 문화의 기를 죽인다. 문화가 주뼛주뼛하고 자기 위상을 차지하지 못할 때 문화는 정치의 식민지가 된다.
문화의 자리는 뒷줄이 아니다. 문화의 세기가 온다는데 문화가 언제까지 뒷자리에 돌아앉아 식은 국밥이나 말아먹는 신세라야 할 것인가.
문화는 당당한 것이고 아무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위신을 잃은 문화는 천하다. 문화는 그 자체가 품격이요 품위다.
문화는 구걸할 것이 아니다. 정부가 오히려 문화예술인들에게 사정해야 한다. 막말로 하면 연극인은 자기 연극이나 하면 됐지 세계연극제 같은 것은 안해도 그만이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유치할 일이다. 생기는 것 없이도 자기 돈 써가며 예술에 매달리는 말리지 못할 신명들. 정부가 시킨다고 하겠는가. 이 신명들을 부추겨 주지 않는다면 정부가 문화예술의 발전을 어떻게 책임지겠는가. 지원이 어째서 은혜인가.
문화행사들이 줄줄이 시작되는 이 가을에 문화의 위의는 자기 자리를 찾아야겠다.<본사 논설고문>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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