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의 죽음은 인간지사의 허망함을 느끼게 한다. 너무 갑작스럽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상과 이별하기에는 너무 젊고 아름답기 때문일까?엊그제까지만 해도 내전의 현장에서, 지중해의 푸른 바닷가에서, 대인지뢰로 발목이 잘린 흑인 소녀의 손을 어루만지는 성녀의 모습으로, 때로는 백만장자 애인의 품에 안긴 한 여인의 모습으로 그는 우리들의 눈에 선하게 남아 있었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한 보통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명예와 아름다움, 가문과 돈이 다 무슨 소용인가라고. 누구는 「행복」을 빼고는 다 가진 여자였다고 말했다.
찰스 왕세자와 결혼한 스무살 이후 죽는 순간까지 16년 동안 그만큼 철저하게 세인의 이목에서 해방될 수 없었던 여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여러가지 이미지로 비쳐왔다. 유치원 보모에서 신데렐라로, 우아하고 기품있는 대영제국의 왕세자비로, 평화와 인권의 사절로.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 아이의 평범한 어머니로, 질투와 정염에 불타는 여인으로, 바람난 돈많은 이혼녀로 비쳐쳤다 이중 부정적 이미지는 상업 언론의 집요한 추적에 의해 확대재생산됐다. 찰스 왕세자의 부정을 폭로한 언론은 다이애나로 하여금 결국 왕실 승마 교관과의 혼외정사까지 시인하게끔 만들었다.
왕실은 그가 기본적으로 한 여자이고 자연인임을 이해하거나 인정치 않으려 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집요하게 그도 감정과 욕망이 있는 한 여자임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이것이 다이애나의 원초적 비극성이 아닐까?
세상 사람들은 그가 남편 아닌 남자와 외설적인 대화를 나누고, 반라의 모습으로 애인과 포옹하는 한 장의 사진과 한 통의 전화녹음에서 묘한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그 대리만족을 상업적으로 이용한 사람들은 바로 「파파라초」(상업 사진사)들이다.
누가 다이애나를 죽였는가? 이른바 명사의 사생활을 「몰래 카메라」로 훔쳐보고 싶은 세인들의 지나친 관심, 공범은 바로 우리와 이시대의 「관음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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