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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에 갸울이는 수숫대처럼/김열규 인제대 교수(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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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에 갸울이는 수숫대처럼/김열규 인제대 교수(아침을 열며)

입력
1997.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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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아침 저 아스라한 하늘 끝에 정신의 얼굴이 트인다』고 한 것은 독일 낭만주의의 정화 프리드리히 휄덜린이다.하늘의 정신의 빛살 맞으며 우리들 정신 또한 드맑아지는 한 철, 그게 곧 가을이다. 그러기에 하다 못해 가을에는 빈 들판 수숫대마저도 깊이 고개 숙인다. 하고는 가볍게 설렌다. 바람탓은 아니다. 제 사념으로 고개 갸우뚱대기 때문이다. 그런게 가을이다.

신 새벽, 맑디맑은 샘물 한잔으로 입 가시면, 혹은 뒤란 뜰에서 갓 익은 배 한 알 입에 물면 삽상해지는 머리속, 투명해지는 상념, 가을살이는 그렇게 비롯한다.

그럴때 우리들은 살아 있는 증험으로도 책읽기를 한다. 목숨 부지한 자의 살아 있을 절대의 이유는 삶의 최대한의 활용이라고는 누가 말했던가. 가을 삶의 최대한의 활용, 그 때문에 우리는 책읽기를 한다. 배나 수수만 익으라는 법은 없다. 가을엔 인간 정신 또한 익어야 한다. 인품의 성숙을 증험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책을 읽는다.

한데 이런 경우, 책이란 어떤 것일까? 저 흔해 빠진 천속한 일부의 베스트셀러? 약삭빠르게 돈 벌고 권력 챙기고 하는데 도움을 줄, 잔재주나 훈수? 천만에! 당치도 않다. 대개 이 따위들은 그 못된 재미나 자극에 홀려서 한번 스쳐보면 그만, 이내 다 마신 주스깡통처럼 내던질, 그래서 「24시간 편의점」 상품과 다를게 없는 가짜 책들이다.

가을에 읽을 우리의 책은 이를테면 아침 샘물 한 잔처럼, 깊이 들이켜서 마음 씻가실 수 있는 것, 혹은 아싹하니, 입에 물리는 배처럼 향기며 맛이 우리들 영혼 속속들이 스미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서 『이 한 권 있었음으로써 나의 인생, 달리는 말고 꼭 이러저러 하였노라』고 말할 수 있는 책, 그러기에 평생을 함께 해로할 수 있을 책, 그 겉장 반질반질 손때 묻은 채로 윤이 나는 책이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일상생활의 마디마디에서 내 생각으로, 내 말로, 그리고 내 행동으로 문득문득 되살아나곤 하는 책이어야 한다.

이런 책이면 대체로 인문적 교양서이기 마련이다.

세계는 무엇인가? 인간은 누군가? 이런저런 세계에서 저런이런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마지막 눈감을 때, 돌이켜 보아서 부끄럼 덜하고 아쉬움 적게 사는 길이란? 이런 물음을 마주 앉아 의논하듯, 파고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 하나뿐일 영혼을 우리들 스스로 영글게 할 가르침이 담긴 책, 우리들 마음이 과일이라치면 과원에 넘칠 햇살같을 책, 그런 책이면 가을 읽기로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들, 이를테면 반문맹이 되다시피한 우리들 딱한 처지로서는 그러한 가을 읽기를 하기가 힘겹다. 가령 영국의 문학평론가 조지 스타이너가 지적했듯이 현대의 대중이 가까스로 한글이나 깨우친 차원의 쉽고 재미난 글읽기에만 길들어 있다면 반문맹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저녁밥 먹고난 뒤, 군것질거리 따위 입에 물고는 모로 길게 누워서 몽롱한 눈으로 훑어가도 모를게 없는 독서, 고스톱으로 돈 따먹기하듯 지식이며 정보 따먹기나 할 독서, 노래방에서 소리지르듯 심심풀이 할 독서, 포르노에 탐닉하던 그 눈으로 들여다보는 책읽기. 이미 향락이 되고 오락이 되어버린 글 읽기. 소비가 된 책보기, 소모품이 된 책.

반문맹 대중에게서 독서란 이런 것이다. 소비사회며 대중문화와 야합한 학교교육이 그들을 양산했다. 학교교육이 무식꾼(?)을 대량생산했다는 것은 참 재미있다.

잘 먹자! 잘 입자! 잘 놀자! 이 「3잘」은 현대 한국대중의 신주단지다. 우리는 다들 이 「3잘」로 미치다시피 돌아쳤다. 인간성이나 교양 따위는 막판 세일을 한대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이러면서 반문맹의 대중은 나라를 파탄으로 몰았다.

그 잘난 제 몸뚱어리 하나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놀렸으면 그 타성으로라도 제 마음이며 정신,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놀릴 생각들은 왜 하지 않았을까.

이제 우리들 그 생각 좀 해야겠다. 정신의 얼굴이 동트는 저 가을 아침, 고개 숙인 수숫대 흉내라도 좀 내자.<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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