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랑에 떠밀려간 명나라땅 136일 8,800리 고난의 귀로/빗장잠긴 대제국의 실상 유려한 필체로 생생히 파헤쳐/“위기극복극적인 사건전개는 오디세이와도 비견될 정도”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 우리에게 세계화·국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명제이다. 세계의 3대 표류기로 꼽히는 15세기 후반 금남 최부의 표해록은 단순한 중국 명제국의 탐험이 아니라 시공을 뛰어넘어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인간의 끊임없는 도전의 상징이었다. 무엇보다 「표해록」은 응축된 시대정신의 표상으로 그 행간에 도도히 흐르는 자주정신과 충효사상은 세계화·국제화시대에 있어 모든이의 삶의 좌표가 될 것이다.
기행문학의 백미이자 중국사연구의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표해록」은 그러나 후대의 무관심으로 정작 우리에게는 아직 낯 설기만하다. 오히려 중국 일본 미국 등 해외에서 더욱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한국일보는 「97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표해록」의 발자취를 따라 선인의 고고한 삶과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주간 시리즈를 마련한다.<편집자 주>편집자>
조선시대 최부(1454∼1504년)가 쓴 중국기행문 「금남선생표해록(3권)」은 우리나라 기행문학의 백미이자 세계적 표류기로 평가받는다. 학계는 세계 3대 중국기행으로 13세기 이탈리아 베니스상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9세기 일본스님 엔닌(원인)의 「입당구법순례행기(신라 장보고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들어 있음)」, 그리고 최부의 「표해록」을 꼽는다.
1488년 윤 1월(음력·성종 19년) 제주도 추쇄경차관 최부는 부친상을 당해 전라도 나주로 귀향하다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다 (추쇄경차관은 다른 곳으로 도망간 백성을 송환 처리하던 특파관원이다). 모진 고난끝에 중국(명나라) 저장(절강)성 닝보(녕파) 타이저우(태주)연안에 상륙한다. 해적을 만나 털리고 왜구로 몰려 죽을 고비도 여러번 만났으나 강인한 의지와 뛰어난 위기관리, 탁월한 지식으로 끝내 조선관원의 신분을 인정받았다. 그는 일행 42명과 함께 베이징(북경)을 거쳐 6월 무사히 귀환, 불과 8일간의 집필로 전인미답의 중국기행을 남겼다.
고국땅을 밟기전까지 136일, 8,800여리의 고난어린 귀국길에서 최부는 조선 선비의 높은 긍지와 엄격한 자기관리로 중국인의 존경을 받았다. 어떤 조선인도 겪지 못한 역사적 체험(표류의 기구한 역정과 견문, 명의 사회실상)을 정밀한 관찰과 유려한 필치로 생생히 엮어냈다. 이 파란만장한 중국기행 기록이 바로 「표해록」이다. 최부는 귀국 후 성종의 명에 따라「표해록」을 집필한 뒤 1491년(성종 22년) 사헌부지평(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아무리 왕명이라도 복상하지 않고 서울에 머무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뒤 홍문관 교리 및 응교를 역임한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체홉의 「시베리아 기행」 등이 그렇듯이 기행문학은 「이문화와의 만남」이라는 비교문학, 문화교류의 시각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특히 조선시대의 문학유산 중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장르가 있다. 해외기행을 다룬 「연행록(중국), 「동차록(일본)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해외나들이는 외교사절단의 공식기행(중국, 일본)에 국한되어 있었다.
우리는 기록을 통해 선인들의 다른 세계와의 만남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촘촘한 것, 거친 것, 비범한 것, 평범한 것 등 기록은 각양각색이지만 한 시대의 귀중한 증언으로 매우 값진 사료들이다. 이른바 「북학」이나 「서학」 모두 이 루트를 통해 들어왔다. 그들이 견문하고 체험한 중국문명의 정보, 이미지는 중국측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하고 개성적인 사료성을 지닌다.
잘 짜여진 기록은 사료성 뿐만 아니라 짙은 문학성도 있고, 또 이문화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고도의 자기성찰을 통한 개혁사상이 돋보인다. 대표적인 것으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꼽을 수 있다. 표류가 모티브가 된 기행도 있지만 생환자가 드물고, 조난자 거의가 지식이 미약한 뱃사람들이라 뒷날 세계에 내놓을 만한 멋진 「표류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모든 「연행록」은 쓴 사람과 시대가 바뀌어도 서울, 베이징간의 똑같은 코스를 반복하는 「선운동」처럼 돼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
그러나 최부는 표류라는 비일상적 사건으로 조선사절의 「궤도여행」에서 벗어나 전무후무한 체험공간의 확대를 이룩했다. 그 어떤 외국인도 꿈꾸지못한 명제국의 안방을 종단하는 「대운하 기행을 해낸 것이다. 체험공간의 확대에 따라 서술세계도 자연히 확대된다. 최부라는 중국문명에 통달한 한 외국인이 빗장을 굳게 잠근 15세기 명제국의 실상을 소상하게 관찰, 기록해 세계적인 사료를 제공한 것이다.
표해록 속에서 펼쳐지는 위기와 극복, 사건의 극적 전개는 다큐멘터리의 재미가 물씬해 마치 그리스의 고전 「오디세이」를 읽는 기분이다. 최부의 사람됨을 살피고 배우는 것은 자아를 잃어버린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유교이념의 종법사회인 조선의 최고 덕목은 효. 효의 극단적 표현은 복상이다. 최부는 중국에서도 상복으로 일관했고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상복을 바꿔입지 않았다. 해적을 만났을 때도, 황제를 알현할 때도 상복을 고집했다. 전 서울대총장 고병익 박사는 「상복의 논리」라 이름했다. 시대의 윤리덕목을 끝까지 지킨 최부의 강인한 자아를 잘 말해준다.
충의 사상도 뚜렷했다. 그는 시종 철저한 공인정신으로 행동했다. 비록 조난자의 신분이지만 조선인으로서 예를 지켰고 도처에서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냈다. 또 국가기밀에는 입을 다물기도 했다. 조선역사를 묻는 관헌에게 「단군건국설」을 말했고 『고구려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중국의 백만대군을 물리쳤다. 지금 조선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합친 강대한 나라』라고 했다.
최부는 「동국통감」의 신사론 204편 중 절반이 넘는 118편을 집필한 당대 으뜸가는 신진사관이다. 그의 사관은 중국문명에 대한 친밀성이 강했으나 표류 중에 민족주의자로 회귀하는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관념적인 주자학 원리주의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 어려운 나그네길에서도 본국의 농민을 생각해 중국의 「수차(논에 물을 퍼올리는 기구)」를 연구해 귀국 후 제작했다. 1496년(연산군 2년) 그가 제작한 수차는 충청지역에 보급되기도 했다.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돼 함경 단천으로 유배된 최부는 1504년 다시 갑자사화때 51세의 나이에 아깝게 처형되었다.<박태근 대표집필>박태근>
◎표해록 연재를 축하하며/양퉁팡(양통방·북경대 한국학연구중심주임교수)/조선선비의 전인미답 기행/중국서도 연구열기 높아
한국일보가 최부의 「표해록」을 연재해 독자에게 선보이게 된 것을 충심으로 축하합니다.
「표해록」은 15세기 조선의 선비 최부가 쓴 중국견문록입니다. 이 책은 명나라 홍치연간의 중국에 대한 넓고 깊은 내용으로 명대 중국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문헌입니다. 저자는 해박한 지식과 임기응변의 슬기, 그리고 훌륭한 자주정신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오해를 풀고 마음으로 상대를 사귀어, 중국 땅 곳곳에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표해록」은 두 나라 사이의 전통적 우의를 다지는 매우 귀중한 책입니다.
최부는 바로 정도만을 걷는 선비로 나라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았고 평생 바른 말과 행동으로 일관해 우리는 최부를 통해 조선시대 선비의 나라사랑, 인간애, 도덕심을 남김없이 체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베이징대 한국학연구센터에 몸 담아 중국인이 한국을 이해하고 또 한국인이 중국을 이해하는 보람있는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중국을 정확하게 서술한 최부의 명저가 우리 연구센터의 거쩐자(갈진가) 교수의 수고로 중국학계와 독자들에게 소개돼 96년 베이징대학 학술상을 받았습니다.
최부의 「표해록」은 한국 북한 중국 일본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이미 번역 소개됐으며 아울러 여러 나라 학자들이 심혈을 쏟아 연구하고 있습니다.
「온고지신」이란 옛말대로 민족의 문화유산을 깊이 이해하는 일은 전통을 계승·발전시켜 보다 풍요로운 미래를 건설하게 되는 첩경입니다. 짧은 보잘 것 없는 글발로 삼가 축하의 뜻을 전하는 바입니다.
▷표해록 집필진◁
고병익 전 서울대총장
박태근 관동대 객원교수
존 매스킬 전 컬럼비아대 교수
마키타 다이료(목전체량) 전 교토(경도)대 교수
양퉁팡(양통방)·거쩐자(갈진가) 베이징(북경)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