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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군대위안부 만행­훈 할머니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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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군대위안부 만행­훈 할머니 증언

입력
1997.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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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군 10∼20명에 짓밟혀”/식사 하루 두끼… 반찬은 오이절임뿐/만삭때까지 ‘손님’ 받는 동료 보기도/동거 일 남자 전쟁 끝나자 ‘나 몰라라’훈할머니의 고국방문 기간에 혈육찾기 작업과 함께 일본군 군대위안부 경험에 대한 증언채록이 이뤄졌다. 한국정신대연구회(회장 정진성)는 6월 프놈펜을 방문, 1차 인터뷰를 한 데 이어 8월6, 16, 18일 세차례에 걸쳐 증언을 받은 뒤 훈할머니가 42년 4∼5월께 끌려가 싱가포르와 프놈펜에서 3년여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대연은 이를 토대로 할머니를 위안부 피해자로 공식등록하고, 보건복지부에 위안부 생활지원금을 신청키로 했다. 정대연의 증언보고서를 위안부 생활을 중심으로 발췌정리한다.<편집자 주>

『나 자신도 궁금하다. 왜 끌려가게 됐는지. 어느날 웬 일본사람과 군인 등이 몰려와 빨리 짐을 챙기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 일본사람을 몹시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가방에 옷과 사진 몇장을 챙겨들고 나온 나를 떠밀 듯 데려가자 아버지는 내 손을 붙들고 눈물만 흘렸고 어머니는 바닥에 쓰러져 통곡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두려움에 떨며 끌려갔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여자들이 불어났다. 더러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내 또래거나 어렸다.

민가에서 하룻밤을 자고 마산에 모인 뒤 닷새후 배에 태워졌다. 3층짜리 큰 배였고 여자들도 수백명 되는 듯했다. 나는 맨 아래층 선실서 지내며 밥 먹을 때만 위층으로 올라갔는데 군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긴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은 싱가포르라고 했다. 그곳서 나를 비롯한 9명의 여자가 내렸다.

바다 가까이에 있는 2층집에 도착, 방을 배정받았다. 방은 2∼3평 크기에 침대만 하나 놓여 있었다. 주인은 평상복 차림으로 지내 군인은 아닌듯 했지만 분명 일본인이었다. 그가 내게 「하나코」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첫날 계급이 높아 보이는 나이 든 군인이 찾아왔다. 그는 내가 하도 우니까 불쌍했는지 그냥 돌아갔다. 그길로 도망쳐 무작정 달렸다. 하지만 멀리 못가 붙들렸다. 그때 다친 상처가 아직도 왼쪽 발등에 남아있다.

다음날부터 일본군인들이 몰려와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들은 같은 민족이 아니었으니 불쌍한 마음도 없었을 게다.

내 방에는 군인이 많이 오지 않았다. 하도 울고 소리치니 그랬던 것 같다.

군인들이 와 「그 짓」을 하면 밑에서는 피가 나고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렇게 눈이 나빠진 것도 그때 하도 눈물을 많이 흘려서인 것 같다. 군인을 한 명 받을 때마다 아래층의 목욕탕으로 달려가 병에 든 빨간색 약으로 그곳을 씻었다. 아무리 바빠도 씻는 것 만은 거르지 않았다.

우리는 속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홑겹의 원피스 하나만 입고 손님을 받았다. 주인은 우리에게 「끼는 것」(콘돔을 의미·당시 일본말 「사쿠」로 부름)을 한봉지씩 주고 군인들에게 반드시 끼워주라고 했다.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매를 맞아 가면서도 꼭 끼워줬다. 참 많이 맞았다. 말을 듣지 않는다고 군화발로 걷어차고, 칼을 휘두르는 사람도 있었다.

다들 같은 처지였지만 우리는 마음대로 얘기도 나누지 못했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겨를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살면서도 늘 머리를 단정히 빗고 화장을 해야하는 것이 참 싫었다. 주인은 돈을 준 적은 없지만 옷이나 화장품은 사줬고, 단장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혼을 냈다. 한 달 뒤쯤 다들 함께 배를 타고 사이공을 거쳐 프놈펜으로 갔다. 그 배 안에서 초경이 있었다. 처음 군인을 받았을 때 나온 피와는 다르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 뒤 생리할 땐 하루정도 주인의 허락을 받고 쉬었다.

심할 때 군인을 받으면 몸이 망가지니 쉬게 해줬던 것 같다.

프놈펜에선 아주 큰 2층건물에서 살았다. 한국여자 8명과 베트남 여자 2명이 함께 있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씩 군인병원에 가서 검사(성병검사)를 받았다.

군인들은 싱가포르에서보다 훨씬 많이 왔다. 많으면 하루 20명, 적을 때도 10명 아래로 온 적은 거의 없다. 군인들이 하도 많아 방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는데 이들이 밖에서 문을 발로 찰때마다 안에 있는 군인은 『조토(잠깐만), 조토』라며 말하기도 했다.

한 여자는 임신을 해 고생을 참 많이 했다. 그는 전쟁이 끝났을 때 이미 만삭이었는데 그때까지 군인을 받아야 했다. 피를 많이 흘렸다. 그걸 보면서 하도 무서워 조심을 많이 했다. 밥은 아침 10시께와 해 진 뒤, 하루 두 번을 먹었는데 그것도 군인들이 많을 땐 거르기도 했다. 반찬은 무나 오이절임뿐이었지만 밥은 넉넉히 줬다. 그땐 어렸고 늘 배가 고팠기 때문에 뭐든 다 맛이 있었다.

다다쿠마 쓰토무(지웅력)를 만난 것은 전쟁이 끝나기 두세 달 전쯤(45년 5월께)이었다. 그는 내게 참 잘해줬다. 일주일에 2∼3번 정도 왔는데 그날은 다른 군인을 받지 않았다. 그가 계급이 높아서인지 주인은 상관하지 않았다. 가끔 그의 집에 따라가 자고 오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인 조선인 모두 떠났지만 나는 함께 살자는 다다쿠마의 간청에 남았다. 사실 나 자신에게 그렇게 죄를 짓고 고향에 갈 수 없었다. 곧 프랑스군이 들어닥쳐 도망다니기 시작했다. 다다쿠마는 왕궁의 부탁을 받고 캄보디아의 독립투쟁을 돕기 위해 남았던 것 같다.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불안한 생활속에서 개띠해(46년) 그의 딸을 낳았다. 나를 숨겨주고 돌봐주던 마을 사람들이 「카오」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유리라는 뜻이다. 다다쿠마도 딸의 얼굴을 보았는데 아예 딸의 존재를 모른다고 했다니 기가 막힐 뿐이다.

그가 프랑스군과 싸우러 간다며 나를 절에 맡겨놓고 떠난 후 중국인 새여자를 얻어 딸까지 낳은 걸 나중에야 알았다.

그 여자와 딸은 폴 포트 정권시절 죽었다고 들었다. 다다쿠마는 고향에 꼭 데려다주겠다고 약속까지 해놓고 캄보디아가 독립한 뒤 말도 없이 일본으로 가버렸다.

캄보디아 남편을 만난 것은 51년께였다. 마을에 힘있는 못된 사람이 부인을 두고도 다른 여자들을 마구 잡아갔는데 나도 잡혀갈 것 같자 주위사람들이 결혼하라고 권해 그냥 살게 됐다.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뒀지만 아들은 폴 포트 학살때 잃고, 술주정이 심했던 남편과도 10년전쯤 헤어졌다.

나 고생한 것은 말로 다 못한다. 산에 숨고, 절에 숨고, 도망다니고, 아들까지 잃고…. 사람으로 태어나 개 고양이만도 못하게 살았다. 그렇게 사느라 부모형제의 이름도 잊었다. 정말이지 짐승만도 못한 삶이었다. 일본은 내게 너무 나쁜 짓을 했다. 다다쿠마도 자기 혼자 살려고 떠났다.

다시 태어난다면 남자로 나고 싶다. 하지만 모국 외에 다른 곳에서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 나는 누가 뭐래도 한국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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