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선 공무원 비리에 민생이 시달리고 있다. 서슬퍼런 사정바람에 밀려 잠시 숨을 죽였던 고질적인 ‘등치기’. 정권말기의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틈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지자체 공무원의 떡값 뜯기, 뒷돈 챙기기식 교통단속, 사고처리 과정에서의 사례비 요구….회사원 박모(32)씨는 8월초 서울 K구 한 네거리에서 앞서 가던 택시와 가벼운 접촉사고를 냈다. 사고처리를 맡은 경찰관은 면허증을 뺏은 뒤 합의를 권했다. 다음날 택시운전사와 합의를 하고 담당경찰관에게 『합의서를 가져 왔으니 면허증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으나 그는 자꾸 딴청을 피우며 면허증을 돌려 주지 않았다.
30여분 가까이 시간을 끌던 그는 박씨를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일단 사건이 접수됐으니 그냥 면허증을 돌려줄 수는 없고 벌금 100만원을 내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왜 100만원이나 되는 벌금을 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빨리 면허증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지갑에 있던 돈 5만원을 꺼내 『수고하시는데 성의 표시』라며 건네 주었다. 돈을 받은 그는 갑자기 화장실에 들어 갔다 금세 나와서는 『받을 수 없다』며 되돌려 주었다. 돈이 적다는 불만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더 줄 돈도 없고 기분도 상한 박씨가 돈을 돌려받아 지갑에 넣자 그는 『오후에 다시 오라』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오후에도 담당 경찰관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계속 시간을 끌다가 다시 화장실로 박씨를 끌고 갔다. 『벌금을 내야 하는 게 원칙인데…』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박씨는 기분이 나빴지만 사고처리 때문에 회사일까지 지장을 받고 있는 처지여서 어떻게든 빨리 해결하고 봐야 했다.
다시 5만원을 꺼내 건넸다. 돈을 더 준비해 가지고 오긴 했으나 담당 경찰관의 태도가 너무 못마땅했다. 그는 이번에는 바로 돌아서서 돈을 세더니 마뜩찮은 표정으로 돈을 챙겨 넣었다. 잠시후 박씨는 면허증을 돌려 받았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돈을 뜯는 경찰의 태도에 치민 부아가 오래도록 가라앉지 않았다. 사고처리에 낭비한 시간도 아까웠지만 자신이 뒷돈을 주어야 할 정도로 죄인 취급을 받은 것이 너무 억울했다. 박씨는 『교통법규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경찰이 벌금 운운하며 겁을 주거나 사고처리를 늦추면 결국 돈을 건넬 수 밖에 없다』며 『경찰이 사고 해결보다는 오히려 사고 처리를 빙자한 뒷돈 뜯기에 열중하는 것 아니냐』고 분개했다.
구청이나 동사무소 직원의 「떡값 뜯기」행정도 서민들을 괴롭힌다.
서울 Y구의 무허가 건물에서 영세부품공장을 운영하는 김모(59)씨는 동사무소 직원들에게 떡값을 뜯긴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들은 공장이 자연녹지에 들어 서 있다는 약점을 노려 필요하면 언제고 찾아 왔다.
김씨가 철거문제로 공무원들에게 시달리기 시작한 것은 95년초. 당시 이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동사무소 직원이 찾아 와 공장을 헐어야 한다며 엄포를 놓았다. 김씨는 『83년부터 땅주인 허락하에 공장을 해 왔는데 지금 헐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사정했다. 통사정에도 꿈쩍하지 않던 동사무소 직원은 김씨가 20여 만원을 쥐어 주자 아무 말없이 돌아갔다.
그후 동사무소 직원은 한달에 1, 2번씩 수시로 찾아 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고 그때마다 5만∼10만원의 떡값을 건네야 했다. 명절때면 어김없이 찾아왔고 여름 휴가철에도 꼭 찾아 왔다. 공장부지가 K동과 S동 경계에 위치해 있어 어떤 때는 양쪽으로 돈을 뜯기기도 했다. 정기검사때면 액수도 20만원 이상으로 커졌다. 『항공촬영에 적발됐으니 천막지붕이라도 걷어야 한다』며 철거시늉을 하는 사진을 찍어 갔다. 담당 직원은 상부에는 건물을 철거했다고 보고해 놓고 김씨에게는 철거 연기를 미끼로 올4월까지 계속 돈을 뜯어 갔다.
『파출소, 소방서에서까지 돈을 뜯으러 나와 한동안 제복입은 사람만 보면 공장 창고에 숨었을 정도입니다. 4월부터 돈뜯기는 게 부담스럽고 기분이 나빠 담당직원이 찾아 와도 돈을 주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6월에 바로 철거명령이 내려 왔어요』
교통 경찰의 뒷돈받기도 공공연하다. 배모(51)씨는 남산순환로 부근에서 U턴을 하다가 경찰단속에 걸렸다. 차를 세워 배씨의 면허증을 받아 든 경찰은 『중앙선 침범은 6만원이지만 3만원 짜리로 해 줄 수도 있는데…』라며 배씨의 표정을 살폈다. 배씨가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자 『왜 아무말도 않고 쳐다보기만 하느냐, 싼 걸로 해달라고 부탁도 않느냐』고 오히려 조바심을 냈다. 『위반을 한 대로 딱지를 끊든지 아니면 봐 주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배씨의 말에 경찰은 마지 못한 듯 딱지를 끊었다. 배씨는 『교통단속시 이렇게 「선처」를 미끼로 뒷돈을 받는 모양』이라고 혀를 찼다.
구청의 「간판세」 뜯기도 여전하다. 「간판세」는 입간판이나 인도쪽으로 튀어나온 돌출간판에 대해 구청에서 부과하는 도로점용료의 별칭. 올 5월 서울에서 도료점을 개업한 이모(43)씨를 지난달초 관할 구청직원이 간판세 문제로 찾아왔다. 그는 『원래 간판세가 20만원인데 내게 7만원만 주면 낸 것으로 해주겠다』며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다. 이씨는 『도로점용료를 받으려면 정식으로 부과를 해야지 왜 뒷돈을 달라는 것이냐』며 거절했지만 담당직원의 요구는 그 뒤에도 끊이지 않았다.
경실련 부정부패 추방운동본부가 최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정식으로 도로점용료를 징수한 건수는 서울 시내 각구청이 대개 수십건에 불과했다. 길거리에 입간판이 늘어서 있고 수많은 상가건물이 돌출간판을 내 걸고 있는 데 비하면 『구청 직원들이 도로점용료 면제를 미끼로 상인들에게 「간판세」를 뜯어간다』는 이씨의 주장에는 고개를 끄떡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수없이 당하면서도 상인들은 이 문제의 공론화를 원치 않았다. 법대로 따지자면 결국 피해는 자신들에게 돌아 오기 때문이었다. 「법대로」를 미끼로 서민생활의 약점을 파고 들어오는 일선 공무원들의 비리를 뿌리뽑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배성규 기자>배성규>
◎비리공무원 작년비 2배 예고/올 6월까지 684명 적발,작년선 넘어/규제·인허가 관련 54% 차지/지자체 징계이행도 절반 못미쳐
정권 말기 사정한파가 수그러 들고 대선을 앞두고 사회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일선 공무원의 「민생비리」가 다시 늘어나고 있다.
30일 감사원에 따르면 공무원 직무감찰 적발건수는 올 6월까지 총 1,584건, 684명에 달한다. 징계·문책을 당한 경우가 108건에 191명, 고발당한 공무원은 23건에 287명, 주의 331건, 통보 830건(206명) 등이다. 건수로는 지난해(총 3,310건)와 비슷하지만 적발 인원은 이미 지난해의 673명을 넘어서 연말에는 지난해의 두 배에 이를 전망이다.
임기말 공무원 민생비리가 위험수위에 달하자 감사원은 8월12일부터 「민생업무처리 부조리 관련 감사원 특별감찰」을 실시, 일선기관의 고질적인 민생비리 뿌리뽑기에 나섰다.
정권말기 공직비리 증가는 대대로 내려오는 고질적 현상. 5공말인 87년 감사원 직무감찰 적발건수는 2,726건으로 6공초(88년 2,410건)보다 훨씬 많았다. 89년 1,895건으로 줄어 들었던 적발 건수는 90년 2,319건, 91년 2,017건, 92년 2,309건으로 대통령 임기말이 가까울수록 늘어났다.
문민정부 초기 사정한파로 잠복기에 들어갔던 공직비리는 93년 1,684건에서 94년 2,416건, 95년 3,007건으로 지속적으로 증가해 공직기강 해이 현상을 대변하고 있다.
공직비리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민생과 직결된 규제와 인허가 분야. 96년 규제행정분야 공무원의 직무비리는 1,790건으로 전체의 54%를 차지했고 인허가 행정과 검사·검정분야도 각각 295건(8.9%)과 103건(3.1%)에 달했다. 인원수로는 규제행정 378명(56.2%), 인허가 103명(15.3%), 검사·검정 41명(6.1%)이었다. 전체 공직비리의 3분의 2가 민생과 직결된 일선행정 비리인 셈이다.
특히 문민정부 초기 감소추세를 보였던 규제행정분야 비리는 92년 673건에서 93년 561건, 94년 757건, 95년 1,240건, 96년 1,790건으로 오히려 급증, 문민정부의 규제완화 정책을 무색케 했다.
임기말 민생 등치기는 액수도 커지고 있다. 서울시 감찰관계자는 『지난해까지는 민원인들로부터 받는 떡값이 보통 10만원에 그쳤으나 최근에는 최하 20만원에서 최고 50만원까지로 늘어났다』며 『특히 건축 위생 주택 세무 등 일선구청의 민생관련 부서는 인허가와 벌금·벌칙 완화 등을 조건으로 여전히 떡값을 뜯고 있으며 수법도 고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일선 공무원의 민생비리는 민선 지자체장들의 「비리 눈감아주기」에도 원인이 있다. 민선 단체장들이 표를 의식, 관내 공무원의 비리를 숨길 뿐만 아니라 자체 감사실 활동도 유명무실화 시켰다고 서울시는 지적했다.
상급 감사기관의 징계요구에 대한 지자체의 징계 이행율은 50%를 넘지 못한다. 중징계는 경징계로, 경징계는 경고나 주의 처분 등으로 낮춰지기 일쑤이고 아예 유야무야되는 경우도 있다.
서울시 감사 관계자는 『지자체가 비리 공무원을 봐 주고 감찰활동을 게을리 하는 것은 공무원의 민생비리를 조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일선 구청에 징계 이행을 의무화하고 감찰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했다.<배성규 기자>배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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