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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 살려라/염재호 고려대 교수·행정학(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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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 살려라/염재호 고려대 교수·행정학(한국논단)

입력
1997.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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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의 열매만 거두려는 단기적 발상 버리고 경제구조 재편 관점서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며칠전 강남의 어느 백화점내 슈퍼를 가보게 되었다. 수입개방의 파고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수입제품들이 소비자의 구매욕구를 충동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중에서도 눈을 끄는 것은 샴푸, 무스, 세탁용품 등 생활용품중에 일본 제품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일본과의 무역역조가 대기업이 제품생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부품이나 생산설비를 일본에서 수입해와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생활용품과 같은 중소기업의 제품들까지 수입품에 의존하는 것은 우리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제품생산을 할 때 필요한 요소는 노동, 토지, 자본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기술이 주요한 생산요소의 하나로 추가되고 있다. 국제무역에서 이들 생산요소가 비교우위를 갖게 되면 수출이 증대되고 외화획득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고도 경제성장하에서 값싼 노동력과 자본의 효율적인 집중, 생산기술의 도입으로 제품생산의 비교우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단기간에 경제성장을 이룩했기 때문에 생산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중소기업들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채 대기업 중심으로 고도 경제성장을 이룬 것이다.

중소기업의 기반이 없더라도 경제가 지속적인 성장을 보이면 큰 문제가 없지만 경제성장이 둔화하고 안정화하는 단계에 진입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차분한 내수시장의 확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속한 경제의 외형적 성장과 수입개방의 높은 파고는 이제 새롭게 중소기업이 제품경쟁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상황을 전개하고 있다. 88서울올림픽이후 급등한 임금, 부동산 투기에 의한 지가 상승, 높은 이자율, 내재화하지 못한 기술력 등 어느 생산요소도 경쟁력을 갖기에는 부족하기 이를데 없다.

전통적인 생산요소에서 더 이상 경쟁력을 가질 수 없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술력에 의한 경쟁우위이다. 하지만 대기업은 자본의 집중을 통한 전략적 경영으로 생산기술의 선진화를 추구할 수 있지만 중소기업은 기술에 의한 경쟁우위를 갖기에 너무 취약한 상태에 있다. 사실 급속히 성장한 우리 경제는 자생적인 기술력을 갖기 보다는 모방에 의한 기술 습득에 의존해 왔다. 게다가 급속한 지가 상승은 제품생산을 통한 이윤 획득보다는 잉여이윤 획득에 대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게 만들었다. 흔한 이야기로 가방회사가 제품생산에서는 이익을 못 남겨도 공장의 지가 상승이 이를 보상하고도 남는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 경제의 기술습득 및 기술창조의 한계는 입시위주로 공부하는 우리의 교육과 유사하다. 수학문제를 풀때 답을 먼저 보고 푸는 것과 같이 제품생산에서도 외국의 제품을 분해한 다음 다시 조립하여 생산하는 역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 방식으로 단기간에 기술의 격차를 줄이려고 했다. 따라서 단기간에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효과는 있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풀어가는 지식창조적 능력은 미약한 것이다. 특히 자본이나 노동의 경쟁력이 취약한 중소기업들이 차분하게 기술력을 축적하기 보다는 돈을 버는 잉여이익에 대한 유혹이 강했던 것은 사실이다.

경제구조를 선진화하기 위해 장기적으로 중소기업의 기반이 확대되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최근 정부의 중소기업육성을 위한 다양한 정책추진은 시의적절하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육성을 단기적으로 벤처기업을 육성하는 형태만으로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중소기업의 거품을 생산하게 될 지 모른다. 불확실성이 많은 벤처기업은 시장논리에 맡기고 오히려 이제껏 전무했던 건전한 중소기업의 육성을 위한 제도의 구축이 더욱 필요한 것은 아닌가. 마치 사회 전반적인 과학기술의 축적이 없으면서도 노벨상만을 기대하는 단기적인 발상처럼, 중소기업의 육성에 있어서도 열매만 거두려는 시도보다는 이제는 차분히 기술을 축적하고 기반을 다지는 작업을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중견기업들의 도산이 이어지고 외환시장에서 원화의 가치가 급락하는 등 심각한 경제난을 만난 것을 위기라기 보다는 그동안 터무니 없이 축적되었던 경제거품을 제거하고 선진경제의 틀을 다시 구축하기 위한 좋은 기회로 보아야 한다. 중소기업 문제를 장기적인 경제구조 재편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단순히 대선에서 정치적인 구호로 활용하고, 단기적인 처방위주로 대응할까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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