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사시(상)는 30세때 처음으로 혼자 물을 마셨다. 40세 되자 누워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 몸을 뒤집었다. 47세때 자신의 생을 보았던 걸까. 갑자기 그는 피를 토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의사는 그가 스트레스로 괴로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연히 붓을 쥐어 주자 그는 차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 스트레스에서 벗어 났다. 그는 기분이 좋을 때만 붓을 잡기 때문에 「기분파 화가」라는 별명을 얻었다…』기타우라 마사코(북포아자·77)씨는 그의 아들 얘기를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그림 엽서 몇장을 선물로 주었다. 초록 빨강 파랑 등 원색을 많이 쓴 추상파 그림들 옆에는 기타우라 히사시(북포상) 작이라고 적혀 있다. 유치원에 들어간 첫 아이의 그림을 자랑하는 젊은 엄마처럼 그는 51세 난 아들의 그림들을 즐겁게 보여 주었다.
히사시는 생후 7개월에 종두 예방주사를 맞고 뇌염에 걸려 오른쪽 반신이 마비됐다. 말도 못하고 몸도 못 움직이고 목젖이 마비되어 음식과 물을 삼키기도 어려웠다. 도카이(동해)대 교수인 남편(기타우라 사다오·79년 작고)과 두 아들을 가진 행복한 주부였던 기타우라부인은 차남이 장애아가 됐다는 사실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는 몇번이나 아이와 함께 자살하려 했다.
『어느날 나는 히사시가 열심히 살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죽으려는 것은 장애아의 엄마로 살기를 겁내는 나 자신일뿐 그 애는 악조건 속에서 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엄마인 나는 그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바꾸자 적응하기가 쉬웠다.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니면서 나는 많은 장애아들과 부모들을 만났고, 아이들의 문제를 함께 의논하게 됐다』
60년대 초까지 일본에는 심신장애가 겹친 장애자들을 받아주는 병원이 없었다. 신체장애를 치료하는 병원에 가면 정신병원에 가라 하고, 정신병원에 가면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고 거절하는 일이 반복됐다. 장애아를 위한 시설들은 규정상 18세 이상의 장애자가 이용할 수 없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59년 심신장애아 부모들이 국가에 시설 지원을 요청했을 때 후생성이 보낸 답변서에는 『사회적 역할을 하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서 국가 예산을 쓸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그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장애나 기타 이유로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없는 약자들을 국가가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가장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고, 그것을 우리 운동의 슬로건으로 삼았다. 가장 약한 사람, 가장 공부를 못하는 학생, 가장 가난한 주민들에게 초점을 맞춰나가면 결국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다』
61년 「중증장애아(자)를 위한 회」가 조직되고, 기타우라 사다오교수가 첫 회장직을 맡게 됐다. 그 단체는 정신과 육체의 장애, 장애아와 장애자를 통합하는 복지의 새로운 개념을 열었다. 그리고 패전의 어려움을 이기고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에 「가장 약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라는 국가적 목표를 제시했다. 장애자정책은 그후 상당한 진전을 보여 전국에 1만6,000명을 수용하는 시설을 갖췄고, 집에서 생활하는 장애자들은 월 8만엔(60만원)의 연금을 받는데, 그것은 생활보호 노인 연금과 같은 액수다.
남편이 별세한 후 회장직을 이어받아 18년간 일해온 기타우라부인은 한국의 장애자 부모 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런 조언을 주었다.
『우리를 도와달라는 운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왜 그 운동이 필요한가를 설득할 수 있는 사회적 목표를 세워야 한다. 또 국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많든 적든 감사해야 한다. 「내 아이가 행복해지면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 지도록 노력하자」라는 것이 우리 단체의 약속이다. 그래서 회원들 중에는 노인시설 등에 가서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들의 장애와 싸우면서 인생에 대해 보다 겸허해 지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됐다는 그는 『장애자들이 사회에 폐만 끼친다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보이지 않게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복을 받게 해달라」고 빌던 사람들이 「나도 복을 짓게 해달라」고 기도하도록 그들은 영향을 주고 있다. 내 아들의 그림은 벌써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기분파 화가」의 어머니는 역설했다.<편집위원·도쿄(동경)에서>편집위원·도쿄(동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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