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이 줄줄이 도산지경에 처하고 은행의 국제 신인도가 추락하는 등 한국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가 시장경제 논리만을 앞세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정부가 금융종합대책을 25일 발표키로 한 것은 그 효과는 차치하더라도 일단은 시의적절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이제까지 정부의 입장은 시장의 자율에 맡겨 도산할 기업은 도산하고 무너질 은행은 무너져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야 경제의 효율성이 개선된다는 것이었다. 정부의 개입은 시장의 자율적인 균형기능을 왜곡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내지 신자유주의적 입장은 효율성만을 고려한다면 매우 타당한 것이 사실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효율성을 유지하는 두가지 수단은 금전적 성공이라는 당근과 파산이라는 채찍이다. 경제전반의 효율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효율적인 기업을 시장에서 몰아내는 「파산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허약한 거위를 체질강화시킨다고 들로 내몰다가 알을 낳게 되기도 전에 죽게 만들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정부의 경제적 역할에 대해서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이래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고전파나 신고전파경제학에서는 정부의 경제적 역할을 「시장의 실패」를 교정하는데 한정하고 있다. 국방, 우편, 공공사업과 같이 시장에 방임해서는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공공재나 외부효과를 공급하고 전화, 전기와 같이 완전경쟁하에서도 자연적으로 독점이 발생하는 부문에 개입하는 것이 정부의 할 일로 간주되었다.
반면에 시장경제가 순환적인 경기부침을 조절할 자율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본 케인스는 정부가 총수요관리를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할 것을 주장했다.
이같은 케인스주의적 처방에 입각한 서구의 복지국가가 위기를 맞으면서 「정부의 실패」도 시장의 실패 못지않게 심각하며 따라서 시장의 실패조차도 시장에 방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신자유주의적 입장이 등장했다. 미국의 레이거노믹스나 영국의 대처리즘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오늘날 한국경제의 위기가 시장의 실패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정부가 개입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위기에 대해서는 정부도 상당한 책임이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대기업이 오늘날 경제여건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을 만큼 비대해지고 은행이 부실채권을 안게 된 것은 과거 정부가 산업정책 등을 통해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탓도 적지않다.
시장경제논리의 기계적인 적용은 어떻게 보면 정부의 실패를 시장에 해결하라고 방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과거 개입으로 인한 왜곡을 바로잡는 차원에서 그리고 국민경제에 대한 충격을 완화한다는 입장에서, 비록 구조조정의 시간이 늦추어지더라도 정부의 교정역할은 필요하다. 자유방임조차도 정부에 의해 집행되었다는 칼 폴라니의 지적을 새삼 되새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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