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반성 외면 피해자의식서 출발/내부견제세력 없어 ‘초국가’ 망령 우려좌익세력이 거의 소멸된 오늘의 일본은 분명히 정치적인 의미에서 보수화한 사회이다. 고도성장으로 물질적 풍요를 획득하고 전쟁과 전후의 물질적 궁핍을 모르는 세대들이 많아짐으로써 좌익 정치세력은 물론 지식인 등 진보적 비판세력들은 어쩔 수 없이 약화일로를 걸어왔다. 이같은 정치적 보수화의 배경에는 중간층 의식을 지닌 대다수 일본 국민들의 「생활보수주의」가 가로 놓여 있다. 이같은 보수주의는 일본만의 현상이 아니고 물질적 성공을 이룩한 서방국가들에서 두루 발견되는 현상으로 새삼스럽게 문제삼을 일은 아니다.
문제는 보수주의적 헤게모니가 정착된 일본 사회내에서 대두되고 있는 변혁운동의 동향과 그 내용이다.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일본은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하기 시작하였다. 전후 국가구조를 새로운 체제로 바꾸고 국제적 위상을 재정립하려는 이 「개혁」운동에는 각계각층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직설적으로 대담하게 표출되고 있다. 이 개혁의 목소리들은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으나 정부기능 축소와 시장기능 활성화를 꾀하는 신자유주의적 경향과 국력에 걸맞는 국제 위상을 추구하는 신국가주의적 경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오늘날 대두되고 있는 일본 신국가주의의 내용이 특별히 과격하다거나 위험하다고 평가될 정도는 아니다. 국가의 정상적인 자위권 회복과 국력에 걸맞는 위상 추구등은 사실 그간 억눌려 왔던 내셔널리즘의 자연스러운 자기 고취로 볼 수도 있다. 일본 보수주의가 수동적인 대미 협조주의와 경제우선주의에 치우쳐 왔기 때문에 그 틀을 넘어서려는 개혁의 담론들이 적극적인 내셔널리즘의 고양에 경도하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고 경제대국으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추구하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국가주의를 주창하는 세력이 일본내에서 지배적 다수를 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동향을 경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다음의 두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역사적 자기반성을 결여하고 있다.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결코 「부당하게」 억압되었던 것이 아니다. 과거의 극단적인 국가주의가 자행한 비인도적 침략행위로 인해 그것은 일본 국내와 세계의 민주세력에 의해 「영원히」 거부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80년대 이래 대외 무역마찰 등으로 외압에 대한 일본 사회의 경계심이 커지면서 일본 내셔널리즘은 마치 미국 등의 외압에 의해 억울하게 억압당해온 속죄양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다. 이 천박한 역사의식의 배경으로는 일본인들 내면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피해자 의식」을 들 수 있다. 동시에 여기에는 일본 성공의 특수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대국의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아직은 걸음마 단계에 있는 일본 내셔널리즘의 앞날이 불길해 보이는 것은 일본 사회 내부에서 그것을 견제할 세력이 거의 소멸되었다는 사실과 깊이 관련있다. 앞서 지적한 일본사회의 정치적 보수화 상황으로 인해 좌익세력과 상당 정도 겹쳐 있던 민주적 비판세력이 거의 힘을 상실하였다. 또한 다른 선진국들과는 달리 건전한 시민사회의 형성이 매우 더디다는 일본 사회의 특수성도 대안적 견제세력의 부재를 우려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국가적 위기가 발생한다면 집단주의적 전통을 지닌 일본은 쉽게 과거와 같은 초국가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 사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이다. 비록 국가 관료가 강력하기는 하나 상대적으로 다원화한 사회로서 합리적인 결정을 도출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미 반세기동안 평화헌법을 잘 지켜 왔으며 개혁의 목소리들 가운데에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려는 진보적인 논의들도 많다. 일본은 그러한 저력을 토대로 하여 보다 깊은 역사적 자기 반성에 도달하도록 애써야 하겠고 일부 그릇된 움직임을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이성적인 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일본은 믿을만한 이웃으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그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국제사회의 지도자로 성장할 것인지 천박하고 위험한 이웃으로 부단히 외압과 견제를 받는 국가로 남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일본 국민과 그 지도자들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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