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간의 한 계간지 권두언은 참담한 어투로 이렇게 단언한다. 『정치는 없고 정치인만 있다』 이 말에 아무런 유보없이 동의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오늘의 정치상황이다. 그 글은 『완전히 어린아이들의 치졸한 싸움』이며 『3류영화 같은 정치인들의 행태』라고 마구 야유하는데도 『아니다』라고 부인할 수도, 아니, 『그래도…』라고 변명쯤 해줄 수도 없게 하는 것이 지금 정치인들의 「천박한」 몰골이다. 요즘 신문 정치면의 보도를 보면 우리의 정계에 대해 어떤 야유를 퍼붓고 어떤 냉소를 짓더라도 이해는 커녕 동정을 살 여지도 없게 되어있다.노동법과 안기부법이 근래에는 볼 수 없었던 추태로 억지 통과되던 연초만 해도 여야간에 조금이나마의 비판과 반성이 있어 정치적 정도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여름, 그 희망은 거품으로 스러지고 말았다.
그 희망의 스러짐은 여당 대통령후보 아들들의 병역 문제에서 우선 드러난다. 어쩌면 고의적으로 군 면제를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도층의 아들이 어색한 경위로 군 복무를 하지 않은 것은 윤리적으로 충분히 혐의받을 일이다. 그러나 국회가 70여개의 민생법안을 단 몇분만에 의장이 법안 이름을 읽어내기도 어려울 만큼 급하게 통과시키면서 그 후보 아들들의 군면제 사유를 가지고 의정 단상에서 며칠동안 입씨름을 벌였다는 것은 사안의 본말을 뒤집은, 무책임한 배임행위이다. 누군가의 조롱대로,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일으킨 문제로 싸움을 벌이는 사람들에 불과할 뿐이었다.
정치의 실종은 그리고도 계속된다. 혹심한 경제 불황 속에서 대기업들의 부도가 잇따르고 중소기업들이 쓰러지며 금융계의 위기 때문에 국제 신용도가 추락하고 있는데 정치인들은 이에 대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한 대통령 후보가 현장에 가서 논의하는 것이 기껏이었고 그나마 대선을 위한 정치적 쇼라고 상대 당은 비난했다. 또 왕년의 종교계 지도자가 월북했는데 그 사태의 심각성은 제쳐놓고 이른바 색깔론으로 서로 상대당에 대한 덤터기 씌우기 작전으로 힘을 소모하고 있다.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국민들의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마저 자신들의 대권 칼싸움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는 사라지고 권력 장악의 의지만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하다.
당연히 정치의 실종은 정치 도의의 실종이다. 여기서 「도의」는 「정」은 「정」이라는 엄숙한 고전적 의미에서의 도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균적인 시민으로서의 양식 정도를 말할 뿐이다. 그런데 대선후보의 경선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서약을 하고서는 바로 다음날 그 공공의 약속을 깨뜨리고 딴죽을 건다면 정치인 이전에 인간적인 신뢰감을 잃을 일이다. 한 친구의 『정자와 정치인간의 공통점은 인간이 될 확률이 매우 낮다는 점이다』라는 농담을 실감으로 느끼게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정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정치가도 역시 없고 오직 열등생 정치인만이 득실거리는 셈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 정치사에는 정치가 없었던 시절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시절이 유신시대였는데 이때는 독재적 통치자 아래 명령과 거부, 어용과 반체제만이 있었고 토론과 타협, 비판과 대안이 불가능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권력과 행정만 있을 뿐 정치와 경쟁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독재가 없는 문민시대에, 명령도 동의받아야 하고 거부도 비판적 대안으로 수렴될 수 있는 시절에, 정치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반유신」의 시대에 유신시대적 정치 상황에 빠지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낮은 지능지수(IQ) 때문일까, 타락의 정도가 한껏 높아진 감성지수(EQ) 때문일까. 정치인들이 드러낸 이 낮은 지수(Q)의 제고문제는 그들 자신이 일으킨 문제거리이기에 그들 스스로 논의해볼 일이다.
지난 일요일 TV의 「진품 명품」프로에서는 해공 신익희 선생의 글씨가 감정의뢰되었다. 활달한 명필의 그 글씨는 「부책정치」 넉자였다. 모든 것이 현저하게 변하고 달라진 이제 정치인들만은 40년전 해공 선생의 단 넉자의 가르침을 새로 배워, 정치를 소생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대선에 앞서, 대권에 우선하여, 우리 정치인들이 시급하고 진지하게 다뤄야 할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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