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을 일본에서 보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가해와 피해의 묵은 상처가 도지는 일본의 여름―그들에게 1945년 8월은 아직 풀지 못한 숙제다.히로시마(광도) 와 나가사키(장기)에 차례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6일과 9일, 일본의 항복으로 2차대전이 끝난 15일, 1945년 8월의 그 숨막히던 열흘은 오늘 일본인들에게 3개의 위령제로 살아나고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 사몰자 위령 및 평화기념식을 각각 원폭일에 맞춰 거행하고, 15일 도쿄(동경)에서 전몰자 추도식을 열면서 일본은 과거의 망령과 대면하고 있다.
6일 히로시마의 평화기념공원은 52년전 원폭으로 숨진 20만명의 넋을 위로하고, 반핵 반전을 다짐하는 수만 인파로 하루종일 붐볐다. 시민들은 위령비 앞에 평화를 기원하는 종이학과 꽃을 바치고, 저녁에는 평화의 불을 밝힌 수백개의 등을 강물에 띄웠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원폭 돔과 기념관에 진열된 원폭의 잔해들은 인류사상 처음으로 인간을 향해 던진 원자폭탄의 가공할 파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순식간에 폐허가 된 시가지, 불타고 찢기고 한데 엉긴 시체더미, 고열에 그을은 옷과 생활용구 등은 핵무기에 대한 공포와 저항을 불러 일으킨다. 사람들은 히로시마의 슬로건인 『노 모어 히로시마!』를 합창으로 절규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핵무기는 물론 금지돼야 한다. 그런데 원폭 희생자들은 무엇의 피해자들인가. 미국이 사용한 비인도적인 살상무기의 피해자인가. 무모한 전쟁을 일으키고 악행을 저지른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자인가. 원폭은 전쟁을 끝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나. 그것은 일본에 대한 천벌이었나. 죄없이 죽은 국민들에게 일본은 어떻게 속죄하고 있나….
히로시마 슈도(수도)대학의 평화학 교수인 미츠오 오카모도씨는 원폭에 관한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프랑스 언론인 로베르 기엥은 히로시마의 원폭 돔을 본후 『나는 경악과 수치심에 휩싸였다. 서방의, 과학의, 인류에 대한 수치심을 느꼈다』고 썼다. 그러나 나는 일본인으로서 난징(남경) 대학살에 대해서, 731부대의 악명높은 생체실험에 대해서, 한국인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던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 종군위안부에 대해서, 수치심을 느낀다. 이런 전쟁범죄는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원폭투하는 또 다른 문제다. 1945년 8월6일은 인류의 역사에서 수치의 날로 기록돼야 한다…>
일본이 독일처럼 과거와 단절하지 못하고, 왜 아직도 과거의 포로가 되어 있는가 라는 문제는 일본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니혼 게이자이(일본경제)는 15일자 사설에서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독일과 일본의 전후처리가 달랐던 배경에는 상황의 차이도 있었다. 종전과 함께 독일이 동서로 분단된후 국제사회에 복귀하여 무역으로 활로를 찾는 것이 시급했던 서독은 서방세계가 요구하는대로 과거와 확실하게 단절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은 주변국들은 대부분 전후에 독재국가가 되었고, 일본은 미국의 그늘에 숨어있기만 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독일의 전후보상은 개인을 상대로 했으나, 일본은 국가를 상대로 하여 외교적으로는 타결되었지만 피해자 개개인에게 보상이 전달되지 않았다는 점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그 사설은 독일이 프랑스 이탈리아 체코 등 12개국 전문가들과 공동집필한 역사책을 고등학교 교과서로 쓰고 있음을 지적하고, 일본도 하루빨리 과거와 단절하여 주변국들로부터 신뢰를 회복하고, 아시아지역의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정착 그리고 한반도의 통일에 기여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가해의식과 피해의식을 분명하게 정리하지 않은 일본의 8월은 계속 혼돈의 여름일 수 밖에 없다. 올해도 나가사키의 평화선언문에서 아시아 침략에 대한 「사죄」가 「깊이 새긴다」로 후퇴했다고 해서 반전단체들의 항의가 있었다. 히로시마를 찾는 세계인들은 『노 모어 히로시마!』라고 외치고 싶다. 그러나 그 전에 일본은 과거를 정리해야 한다. 그래서 8월의 위령제들에서 음울한 패전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소모적인 「사죄」논쟁을 끝내야 한다.<편집위원·히로시마(광도)에서>편집위원·히로시마(광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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