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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한 독립유적지… 잊혀진 애국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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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한 독립유적지… 잊혀진 애국혼

입력
1997.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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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독립운동 메카 국민회본부 첫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한인교회도 수십년 방치/변변한 기념관 없어 사진·문헌자료 대부분 유실미주지역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하와이에는 뜻밖에 제대로 보전된 유적이 한 곳도 없다. 또 해외여행 자유화로 하와이 관광객이 매년 급증하는데도 이들 유적을 일부러라도 찾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고 수많은 여행 안내서 어느 부분에도 사탕수수밭의 고통과 독립운동의 영광을 기릴 수 있는 장소도 소개돼 있지 않다.

와이키키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국민회 본부와 그 중간의 한인기독교회가 그나마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정도다. 하지만 보전상태는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어처구니 없다. 1940년대 당시 포르투갈 공관자리에 들어선 국민회본부 건물은 현재 주거용 건물로 5세대가 임대해 살고 있다. 입구에 달린 현판만이 건물의 역사성을 희미하게 알려줄 뿐이다. 국민회가 1910년대부터 임시정부 지원 등 독립운동의 메카로 사용했던 원래 건물은 하와이 주정부가 징발, 주보건국을 세우는 바람에 흔적없이 사라졌다. 현재 건물은 하와이주가 대토로 내준 것이다. 국민회는 이 건물과 주변 땅에 독립기념관을 세우고 싶다는 뜻을 정부에 전달했으나 기증방식에 대한 정부와의 견해차이 탓에 진전이 없다.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이 서있는 한인기독교회도 그동안 방치돼오다 국내외 기독교인들의 후원으로 이제야 개보수를 시작하게 된다.

독립운동단체의 관련 서류나 문헌 보전 상태도 허술하다.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와 국내 독립기념관에 남아있는 독립공채와 혈성금장부, 관련 사진 등이 전부이다. 홍순영 국민회장은 『정부가 85년 하와이 독립운동과 관련된 서류를 독립기념관에 보전하겠다고 해 사진과 문헌을 모아 영사관에 제출했다』면서 『그러나 독립기념관에 보전된 일부 자료를 빼고는 어찌된 일인지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분개했다.

빅아일랜드 한인묘지를 비롯, 호놀룰루 교외의 에바공동묘지와 마우이섬 사탕수수밭의 몇몇 무덤 등에 묻힌 연고없는 한인들도 이제 모두 잊혀진 이름이다. 또 1920년대 이 전대통령이 빅아일랜드에 세운 한인교회와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숯을 구워팔던 숯막은 주택가와 잔디밭으로 바뀌어 위치확인 조차 힘들었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던 기념비는 엉뚱하게도 독립유적과 아무 관계도 없는 영사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한국에서 공수된 돌로 만든 것. 하와이대 최영호 교수는 『이민 2, 3세대로 내려 갈수록 현지사회로 편입되는 사람이 많아 유적에 대한 보전의식이 엷어졌다』면서 『하지만 적극적인 노력을 펼치지 않은 것은 우리들 모두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홍순영 회장도 『우리가 죽으면 국민회 건물이라도 제대로 남아있을지 걱정이 된다』고 안타까워했다.<호놀룰루=이상연 기자>

◎찾는이 없는 이민 1세대 묘지/독립의 꿈 못이루고 사탕수수농장서 스러져간 150여명 한인들의 쓸쓸한 안식처 ‘알라이’/오래된 조화 몇송이만 빗물에 젖어 외로이…

하와이 제도 8개섬 가운데 가장 큰 하와이섬 동해안에 있는 알라이 한인묘지. 열혈 애국자들의 활동으로 일제시대에는 빛을 발했지만 지금은 망각속에 묻혀버린 하와이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가운데 부분이 부러져 땅바닥에 쓰러진 묘비, 바닷바람에 삭아 확인하기 힘든 이름들 위로 오래된 조화 몇송이만이 하루에도 몇번씩 흩뿌리는 빗물에 젖은채 놓여 있다. 94년전 이국땅의 사탕수수밭에서 온갖 풍파를 겪으며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이민1세대들의 안식처치고는 너무나 피폐한 풍경이다.

알라이 공동묘지는 호놀룰루에서 비행기로 40분 걸리는 하와이섬 힐로공항에서 차를 타고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5㎞정도를 달리면 나타난다. 하와이군도중 면적이 가장 넓어 「빅아일랜드(Big Island)」로 불리는 하와이섬은 1940년대까지 사탕수수 농업이 특히 발달했던 곳이다. 한인묘지 주변 역시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이 여러 개 있던 곳으로 한인 이민 1세대 수백명이 거주했다. 묘지에는 주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던 아시아 각국 사람들의 묘지가 구역별로 마련돼 있다.

훼손이 덜한 한인 묘비에는 이들의 이름과 고향이 한자와 우리말로 또렷하게 적혀있다. 「아부지」라고 새겨져 있는 박춘하, 조선인 신공칠, 충청 공주가 고향인 박경춘, 본관이 단양인 이성녀, 생후 1년만에 사망한 사라 김 등 확인할 수 있는 이름만 130여개. 확인이 불가능한 20여개의 무덤까지 더해 모두 150여명이 이곳에 묻혀있다.

묘비명 형식과 묘비 크기가 똑같고 사망연도가 비슷한 중년의 남자 무덤이 10여개나 돼 가족이 없는 독신남성들을 동료들이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단신으로 태평양을 건너온 젊은 남자들은 고국의 신부감과 사진을 교환해 결혼여부를 결정했는데 「사진 신부」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아 많은 사람이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사탕수수 농장의 고된 노동탓인지 40, 50대에 세상을 떠난 사람도 많았다. 부부가 합장된 것으로 보이는 한쌍의 무덤도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묘비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어 현장을 찾은 한인회 관계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묘비에 나타난 망자들의 사망연도는 대부분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집중돼 있었다. 1940년대 이후에 묻힌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한인들이 그때 이 섬을 많이 빠져나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병용 빅아일랜드 한인회장은 『현재 빅아일랜드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연고가 있는 무덤은 전혀 없고 유족이 찾아오는 무덤도 거의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탕수수 재배가 쇠퇴하고 호놀룰루가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당시 거주하던 한인 대부분이 빅아일랜드를 떠났다. 현재의 교민 500여명은 60년대 이후에 이주해 생강재배 등 농업이나 의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한인묘지는 사방을 둘러싼 일본인이나 중국인 묘지와 비교하면 초라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중국인 묘지의 경우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무명 묘비도 여럿 있지만 부러진 묘비는 찾아볼 수 없고 참배객을 위한 정자까지 마련돼 있었다. 이회장은 『알라이 묘지는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위해 외국땅에서 고통을 감내했던 하와이 이민 1세대의 아픔을 품고 있는 곳』이라며 『한국일보 하와이지사와 공동으로 묘지를 보수해 교민들에게 독립의 의미를 일깨우는 상징적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빅아일랜드=이상연 기자>

◎재미독립운동사 연구 안형주씨/“이승만 정권이 역사왜곡/하와이 독립운동 잊혀져”

『이승만정권의 역사왜곡으로 하와이 독립운동사 대부분이 매몰돼 버리고 말았지만 하와이는 중국, 미국본토와 더불어 해외 독립운동의 3대 본산이었습니다』

재미한족연합회 설립자인 김호 선생의 외손 안형주(60)씨가 밝히는 하와이의 독립운동은 중국이나 미 본토 못지않게 치열했다. 상하이임시정부에 거액의 군자금을 대고 미 본토 독립단체와 함께 재미 한인들의 권리 보호와 광복군과의 연계도 도모했다.

하와이 교민들이 상해 임시정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29년. 이승만파와 박용만파의 오랜 대립에 염증을 느낀 하와이 교민 비밀결사 「북성」이 김구 선생을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믿고 접촉을 시작했다. 임정에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대주던 북성의 독립운동이 꽃을 피운 건 1932년 이봉창 의사의 도쿄 일왕폭탄투척사건. 하와이 교민들이 보낸 군자금이 이봉창 의사의 폭탄구입자금으로 쓰인 것이다.

의거직후 비밀결사 북성은 공식 독립단체인 「애국단」으로 발족, 공개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1941년에는 150명의 회원을 갖는 「대한독립당 하와이 총지부」로 탈바꿈했다. 『임성우, 조병요가 이끄는 애국단은 일본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군자금 비밀조달라인을 구축했고 한번에 수천달러의 거금을 보내 임정의 가장 큰 자금원 역할을 했습니다. 백범이 오랜기간 나를 믿고 도와준 하와이 교민들을 만나 보고 광복된 조국에 돌아갈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안씨가 재미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LA에서 전산공무원으로 일하던 87년. 『자식들이 집안 내력을 전혀 모르는 것에 충격을 느꼈어요. 조부인 안창호 목사는 애국단의 일원으로 임정지원에 앞장섰고 외조부인 김호 선생은 재미한족연합회를 결성, 광복군과 재미한인의 연계를 주도했죠. 자식들에게 조상들의 독립운동사를 알려주고 싶었어요』 안씨의 끈질긴 연구와 노력에 힘입어 조부인 안목사는 89년 「건국포장」을 받았고 외조부도 이번에 건국훈장을 받게 된다.

안씨는 자료수집과 서훈수여 문제로 귀국했다. 『재미 2세들을 찾아 다니며 지금까지 재미한인사와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 1,200여점을 수집했어요. 앞으로 국내에 재미한인사연구소를 설립, 해외독립운동의 숨겨진 역사를 연구·발굴할 생각입니다』<배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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