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구효서의 ‘남자의 서쪽’(황종연의 소설읽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구효서의 ‘남자의 서쪽’(황종연의 소설읽기)

입력
1997.08.06 00:00
0 0

◎일탈의 광기에 공감얻는데 성공구효서의 「남자의 서쪽」에는 사십대의 한 남자가 있다. 직장과 가정이 부과하는 역할에 순응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온 인물이다. 그런데 한 젊은 여자와의 정사를 계기로 범속한 의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는 주어진 일상적, 사회적 삶의 관계들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욕망에 붙잡히게 되고, 급기야는 베트남으로 건너가 유랑민으로 살아가기로 작정한다. 이것은 「중년의 위기」라는 대중물의 레퍼토리를 떠올리게 하는 통속적인 스토리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스토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가공하는 방식이, 그리고 그 가공으로부터 생겨나는 해석이 중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남자의 서쪽」은 흥미로운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무엇보다 흥미를 돋구는 것은 사십대의 주인공―서술자가 펼치는 고백의 형식이다. 그는 베트남의 하롱베이에서 만났다는 동년배의 남자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의 전말을 밝힌다. 그의 고백이 진행되면서 확인되는 사실은 상대 남자가 별개의 인물이 아니라 감춰진 형태의 자신이라는 것, 그의 자아 내부에 억압되어 있던 타자라는 것이다. 하롱베이 떠돌이의 환상을, 타자의 돌연한 부활을 기록하면서 그의 고백은 사회적 관습과 규율의 효과로 형성된 그의 동일체적 자아에 치명적인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남자의 서쪽」이 말하고 있는 것은 동일체적 자아의 해체 혹은 사멸 이후에 열리는 어떤 유혹적인 세계이다. 그것은 작중의 남자에게 시간을 초월한 현존을 느끼게 해 준 하롱베이, 그리고 그가 도망치려 했던 원시적 생명과 광기의 고향 「붉은 산」이란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한다. 그곳에서 사람은 인위적 속박에서 벗어나 그의 안팎의 태초의 자연으로, 순수하고 그만큼 광포한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 「서쪽」의 세계는 인간에게 소멸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장소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구효서의 신작은 일상성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충동을 표현함으로써 근래의 소설에 특징적인 일탈의 파토스에 새로운 강세를 부여한다. 주제의 심오함에 어울리지 않는 감각적, 소비적 삶의 자잘한 세목을 차치하면, 일탈의 광기에 대한 공감을 자아내는 데에 성공한 작품이다. 일상 탈출의 모험을 낭만적으로, 비교적으로 규정하려 들지 않고 그것에 내재한 해방과 파멸의 이중성을 알아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성숙한 인간학적 사고를 느끼게 한다.<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