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고있는 것 좀 쓰라” 지시/한번에 억대 로비,비자금 남아있는듯/면회때 필담만 “실어증이 보호막”/영문·성만 적은뒤 금액표시 보안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은 로비의 귀재답게 옥중에서도 정계인사를 대상으로 로비를 시도했다. 이번에는 특급호텔 스위트 대신 수감장소인 서울구치소가 사령탑이었다.
구치소에서는 면회객과의 접견시 대화내용을 기록하는 것이 관례다. 그러나 정총회장은 변호인이나 측근과 면회할 때마다 필담이나 메모를 통해 「소리없는 대화」를 나눠왔다. 뇌졸중으로 인한 실어증과 오른손 마비가 오히려 로비사실을 숨길 수 있는 「보호막」역할을 한 것이다. 그의 실어증에 대해 일부에서 의혹의 시선을 보냈던 점을 곱씹어 볼 만하다.
정총회장은 인물을 표시할 경우 영문 머리글자나 성만 표시하고 화살표로 돈의 액수를 적는 방법으로 보안을 유지했다. 본사가 입수한 메모에는 그가 왼손으로 쓴 지시사항이 또박또박 적혀 있다. 그는 유력한 대선주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면서 한 측근에게 『가지고 있는 것을 좀 사용하라』고 구체적으로 금품살포를 지시하고 있다. 이 메모는 또 로비자금으로 억대의 숫자를 제시하고 있어 전 재산이 압류된 상태에서도 비자금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보사태로 구속되기전 정총회장의 정치권 로비는 내국인들의 발길이 뜸한 특급호텔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정총회장은 구속되기전 지난해 한햇동안만 하얏트 프라자 인터컨티넨탈 롯데호텔 등의 객실을 무려 3백14회 이용하면서 김우석 전 내무장관과 은행장 등 정·관·금융계 인사들을 만나 로비를 벌였다.
한보그룹의 특혜대출과 각종 사업의 인허가를 가능케 한 비결은 은밀하게 건네진 거액의 현금이었다. 골프가방에 1억원, 사과상자에 2억원을 담아 운전사도 모르게 주고받게 하는 치밀한 로비에 녹아나지 않는 정·관계 인사는 거의 없었다. 돈을 주면서도 『존경하기 때문』 『잘 돌봐달라』는 등의 「점잖은」말만 해 부담감을 덜어주었다. 이 때문에 「한보 돈은 아무리 받아도 뒤탈이 없다」는 말까지 나돌기도 했다.
정총회장은 중요한 고비때마다 정·관·금융계 핵심인사들에게 로비를 폈지만 평소 요로에 「보험금」을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검찰수사결과 92∼96년 5년간 국회의원 언론사간부 고위공무원에게 경조사비로 월 1천만원 이상씩 연 1억5천만원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유원건설 최모회장과 세양선박 추모회장에게 위로금 30억원씩을 주며 회사인수에 따른 「눈물값」을 대신했고, 95년 이혼한 셋째 부인에게도 40억원의 위자료를 주는 통 큰 면모를 보였다.
정총회장의 「큰손 로비」행태는 해외에서도 그대로 재연돼 외국출장때는 별도의 운반요원까지 대동했다. 직원들에 대한 격려비도 한번에 1천만∼3천만원을 지급했는데 한 측근은 『명절때 떡값 명목으로 내려온 돈을 적당히 돌리고 남은 돈은 개인용도에 썼다』고 말했지만 자금이 워낙 거액이어서 정밀한 검찰조사에서야 「배달사고」가 발각됐을 정도였다.<이영태 기자>이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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