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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의 장물’ 회수 마땅/신용하 서울대 교수(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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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의 장물’ 회수 마땅/신용하 서울대 교수(아침을 열며)

입력
1997.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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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이 매국대금으로 일제치하에서 조성한 토지재산의 소송 1건에 대하여 지난달 27일 서울고등법원에서 그 합법성을 인정하고 이완용의 증손에게 돌려줄 것을 결정하였다. 더구나 그 판결문에서는 『과거의 일을 정의관념이나 민족감정만을 내세워 문제삼는 것은 오히려 사회질서에 어긋난다』고 주장하였다. 92년 이후 이완용 명의 각종 토지재산이 시가 약 2,000억원, 송병준 명의의 것이 약 3,000억원이라고 보도되어 왔다. 그때 이완용의 증손은 증조부의 토지를 찾아 이완용의 명예회복을 위한 문화재단을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송병준의 손자는 앞으로 찾을 토지재산의 일부를 복지재단 설립에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 고등법원까지 이에 맞장구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문제처리에서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음을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통감하고 있다.이완용은 ①1907년 11월 일제가 을사 5조약을 강요했을 때, 학무대신으로 일본공사관에 출입하며 이의 동의에 앞장서서 매국행위를 한 「을사5적」의 수괴이고 ②1907년 5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추천으로 총리대신 겸 궁내부대신을 겸직하여 실권을 장악하면서 이완용 내각을 수립하자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황제 고종을 강제양위시키고 일본인을 차관으로 임명, 「일본 차관통치」를 허용하며 사법권 및 경찰권을 일본에 위양한 「정미 7조약」을 체결한 매국노이다. 이때 서울시민이 봉기하여 이완용의 거처를 습격했는데, 이완용은 급히 도망하고 그의 집은 소각되었다. 1909년 12월 마침내 이재명 청년이 이완용을 저격했는데 이완용은 간신히 목숨은 건졌으나 중상을 입어 장기입원하였다. 일제는 이완용을 쉬게 하고 박제순을 총리대신 서리로 임명하여 병탄정책을 추진했었다.

일제는 ③이완용의 부상이 치료되자 1910년 6월30일 다시 그를 총리대신에 임명하여 통감숙소에서 사전 협의해 같은 해 8월22일 그의 이름으로 「경술국치조약(통칭 한일합병조약)」에 서명 날인하였다. 일제는 이완용의 매국의 공을 인정하여 병탄 직후 이완용에게 훈1 등 일본백작의 작위와 15만엔의 「은사금」, 총리대신 퇴직금 1,458엔을 주었다. 이것은 당시 고급관료의 평균 월급 20엔과 비교하면, 약 630년간의 봉급에 해당하는 천문학적 액수의 매국대금이었다. 일제는 다시 이완용을 「중추원 고문」에 임명하여 거액의 월봉을 주었다.

이완용은 원래 영락한 잔반 집에 태어나서 서울 친척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이 관계로 그는 한말까지 거처가옥 이외에는 재산이 없었다. 일제가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소위 토지조사사업, 1917년부터 1924년까지 소위 임야조사사업을 하면서 많은 국유지와 사유지를 약탈하여 일본인과 친일파들에게 양여·불하할 때 이완용은 일제로부터 받은 은사금으로 전국에 방대한 면적의 임야·전답·대지를 특혜 불하받아 자기 또는 아들의 명의로 등기하였다. 이완용과 그의 아들 명의의 토지재산이 이 시기에 모두 친일 매국의 대가로 조성된 것이다.

토지조사사업 종료직후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서 전민족이 단결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과거 친일파까지도 독립만세를 불렀을때, 오직 이완용만은 독립만세운동을 신랄히 비난하는 성명서를 3번이나 발표하였다. 이완용은 이 공로로 1920년에 다시 일본 후작의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 퇴관금」이라는 명목으로 또 천문학적 숫자의 거금을 일제로부터 받았다. 하늘도 건망증에 걸렸는지 그를 벌주지 않아서 이완용은 1926년 69세에 편안히 죽었으며, 호화판 장례를 치렀다. 광복이 되자 미군정은 소급법을 제정하여 군정법령 제33호로 재한국 일본인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여 미군정 소유로 했다가, 대한민국 건국후에 이를 인계하였다.

친일파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건국후인 1948년 9월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소급법으로 제정하여 친일 정도가 중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재산 전체를 몰수토록 했으며 경한 자는 등급에 따라 처벌하고 재산의 반을 몰수하며 공민권을 5년간 제한케 하였다. 이완용은 매국노의 수괴로서 사형에 처해지고 그 재산을 모두 국가가 몰수해야할 대상자였음은 논의할 여지도 없다. 이러한 이완용 명의의 토지재산을 국가가 환수하지 않고서 어떻게 사회정의와 국가기강이 서며 어떻게 제2, 제3의 이완용의 출현을 방지하겠는가.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 법원이 이러한 매국노의 매국대가의 재산을 인정하여 그 증손자에게까지 상속시킨다면 이는 사회정의와 질서를 파괴하는 무지한 판결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사유재산을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방법과 절차에 의해 만든 정당한 재산만 보호하는 것이다. 어느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민족반역」이나 「도둑」의 방법에 의해 조성한 재산은 보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장물」로 취급되어 압수된다. 이완용의 토지재산은 도둑질보다 더 죄질이 나쁜 「매국의 장물」이다.

우리 대법원은 최종심에서 정의와 질서를 법률정신대로 실현하는 판결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국회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이완용·송병준 등 매국노의 토지를 국가가 속히 환수토록 해야 할 것이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므로 이 모든 일을 실행하는 힘이 되어야 할 것이다.<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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