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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잊은지 오래됐어요/고시촌 여름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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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잊은지 오래됐어요/고시촌 여름살이

입력
1997.07.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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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캉스·배낭여행 “난 아니야”/새벽운동 체력단련 하루종일 책과 씨름/스트레스 해소는 비디오·만화방서 “고시는 고시”「고시촌」에는 여름이 없다.

방학이 되면서 대학가는 눈에 띄게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하숙생이나 자취생들은 대부분 귀향하고 도서관을 지키거나 카페에 나앉은 학생들도 바캉스나 배낭여행을 얘기하며 어디론가 떠날 준비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입신양명을 꿈꾸며 「고행」을 마다않는 고시생들에게 하한기란 없다.

『여름요? 봄 다음에 오는 계절이지요. 잊은지 오래됐어요. 종종 그 옛날 여름, 그녀와 바닷가를 거닐던 아련한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지요.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느라 고생하죠』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3년째 사법시험공부에 매달려있는 김병기(27·동국대 법대졸)씨의 고백은 대부분 고시생들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드는 공통의 경험이다.

그야말로 독하게 공부하는 고시생들은 바깥 기온을 고시원의 냉방기 가동 정도로 가늠할 뿐이다. 「철저히 외로워지자」는 불문율로 무장한 이들이 에어콘 소리가 센 듯하면 바깥이 무척 더울 것으로 짐작할 정도라는 것이다. 하루 15시간 이상을 공부에만 쏟는다는 김모(25·서울대 법대4)씨는 『자칫 여름철 냉방병으로 고생할까봐 신경을 많이 쓴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들도 노출된 바깥세상과 완전히 담을 쌓을 수는 없다. 특히 여름이면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해도 집중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고시원 건물까지 파고드는 술집에서 들리는 소음과 업소들의 끈적거리는 호객행위가 고시생들을 흔들어댄다. 신림9동만해도 「고시원 3백개, 술집 1천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신림동 라스베이거스」를 찾는게 습관이 돼서는 전력에 차질이 생긴다. 대부분 고시생들의 피서법은 아주 검소한 편이다. 조기축구·농구를 하거나, 관악산 등을 오르며 체력을 단련하는 정도. 인근 신성초등학교에는 매일 새벽 3, 4개 고시생 축구팀과 농구팀의 격전이 벌어진다.

신림동에 고시원 다음으로 많은 것이 비디오방과 만화방.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고시생들의 스트레스 해소방이다. 고시촌 비디오방의 특징은 하나같이 변호사 검사 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비디오테이프가 유난히 많이 비치돼 있다는 것. 고시생들이 휴식중에도 끊임없이 자극과 동기를 얻기위해 이런 프로그램들을 자주 찾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A비디오방 주인 윤모(47)씨는 『심신이 늘어지기 십상인 여름철을 이런 내용의 비디오를 보며 이겨내는 고시생이 많다』며 『거의 매일 일정 시간대에 가게를 찾는 손님들도 꽤 된다』고 귀띔한다.

이들의 술문화는 대부분 「조심 스타일」. 날을 잡아 싼값에 감자탕을 사이에 두고 소줏잔을 기울이거나 간혹 인근 카페에서 시원한 맥주로 더위를 잊는다. 부모님이 보내주는 돈에서 고시원비 학원수강료 책값 등을 빼고나면 용돈은 늘 빠듯하다. 모처럼의 술자리에서도 주요 화제는 「고시는 고시」라는 식의 한탄과 고시정보 교환으로 결코 「본분」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름에는 또 밤낮을 바꿔 생활하는 「심야파」, 일명 나이트 아울(Night Owl·올빼미)족이 부쩍 는다. 새벽 1, 2시. 저녁부터 법률책과 씨름하다 지친 고시생들이 슬리퍼와 추리닝바지 차림으로 분식점에서 라면 등으로 야참을 즐기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사실 여름을 되찾기 위해 이 고생하는 것 아니겠어요? 이겨내야죠』 한 늦깎이 고시생의 변이다.<이동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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