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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용과 오해」론(김성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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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용과 오해」론(김성우 에세이)

입력
1997.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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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것이 알고 싶다.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비서의 지난주 기자회견을 보고나서 여전히 궁금한 것이 있다. 이 회견에서 그의 입을 주시하며 기대했던 것은 북한의 전쟁도발에 대한 증언 못지않게 자신의 사상적 입장에 대한 명쾌한 해명이었다. 이 해명이 남침위험의 경고 포성에 덮여 불분명하게 들렸다. 그의 답변이 애매모호했다.

황씨의 탈북이 귀순이냐 망명이냐를 따지는 것은 굳이 그 어구에 구애되어서가 아니고, 그가 사상적 전향을 했느냐 안했느냐를 검증하려는 것은 결연히 월남까지 한 그 용기를 궁지에 몰아넣자는 것이 아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입장에서 그런 말을 하느냐도 중요하다. 그의 입남은 큰 사건이지만 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사건의 성격이 달라진다.

황씨의 사상문제에 대해서는 안기부측이 그의 입을 대신해 「황씨가 북한 공산체제를 거부하여 망명의 길을 택했고 그동안 주체사상을 통해 김부자 체제보위에 앞장서 온 데 대해 자책감을 느끼고 있어 더 이상 사상 전향 여부를 논할 필요는 없다」고 지레 가로막고 나섰다. 한 사람의 북한 난민이 남하한 경우라면 그 자체가 귀순이요 그 귀순의 사상성을 물을 것 없다. 그러나 황씨같은 북한체제의 사상적 지주였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사람이 망명도 귀순도 아닌 남행을 결행했을 때 남행 그 자체만으로 그의 사상을 불문에 부치기는 어렵다.

황씨가 이날 자신의 사상과 관련해 언급한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다.

―내가 법률상으로는 북에서 남으로 국적을 옮겼으니 망명이지만 내 조국인 대한민국으로 온 것 뿐이다. 귀순이든 망명이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

―주체사상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내가 시작한 것은 주체철학이다. 내 사상의 근원은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주체사상과는 다른 것이다. 내 이론이 북한 정권에 의해 악용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오늘의 비참한 상태로 이끌어 온 통치자들에게 복무해 온 죄과에 대해서는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주체사상이 세계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고 남한의 일부 사람들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고 싶다.

―나는 이미 60년대에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 전향을 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를 고치고 개선해 보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내 철학의 기본은 인본주의요 이 인본주의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구현하느냐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계속 고민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상전환은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황씨의 「오용과 오해」론이다. 그의 발언을 해석하면 자신의 주체철학이 북한에서는 오용되고 남한에서는 오해되고 있다는 말이다. 오용되고 오해되었을 뿐이지 자기 철학의 본질인 인본주의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사상전향은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말로도 들린다.

그러면 그의 주체철학의 인본주의란 무엇인가. 북한에서 주장하는 주체사상이란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상,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인간중심의 사상」이다. 결국 인간중심이란 인민대중 중심이란 말이요 그것은 주체의 이름으로 체제내부를 결속시키기 위한 통치이념일 것인데, 황씨의 인본주의는 북한의 체제와 전혀 상관없는 순수한 휴머니즘이란 말인가.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 철학이 아니었다면 무엇 때문에 이용당했을 것인가.

주체철학의 중심이 인본주의라 하여 이것으로 인본주의가 마르크스주의를 부인하는 것이라 말하지 못한다. 마르크스주의라면 단지 자본주의적인 사회체제를 비판하는 사상으로만 알기 쉽지만 나아가서는 인류의 휴머니즘적 전통을 계승·발전시키려는 사상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세계관은 인간과 그 활동을 출발점으로 하는 것이다.

황씨가 스스로 이미 마르크스주의에서 일탈했다고 말하는 것은 주체철학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극복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불쑥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라니 놀랍다. 사회주의자도 아니요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요 그저 주체주의자일 뿐이라는 주장이라면, 주체주의의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도 공산주의 국가도 아니기를 바랐단 말인가. 자신은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전향이 필요없다는 생각이라면, 우리 남한 국민들은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닌 그의 남하를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시끄럽게 떠드는가.

한 사상가의 사상적 변절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요 그것을 굳이 강요하자는 것도 아니다. 황씨는 「서울에 도착한 이래 많은 것을 배웠으며 큰 대학을 나온 것같다」고 말했다. 그가 지적한 「남의 동포들이 이룩한 성과」는 자본주의의 성과다. 이 「큰 대학」에서 그의 사상은 어느 자리에 좌정하고 있는지, 좀더 분명한 해명을 우리는 듣고 싶다.<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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