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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에 담긴 검은 절규/요절한 흑인 천재화가 바스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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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에 담긴 검은 절규/요절한 흑인 천재화가 바스키아

입력
1997.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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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의 치기어린 그림같은 거친 화풍과 도발적 색채/그러나 그 속에 밴 흑백문제·환경 등 사회적 메시지/뒷골목 아웃사이더에서 뉴욕 화단의 신데렐라로 주목받기까지 짧았던 29년 삶과 예술혼을 서울서 만난다「평생을 뉴욕의 뒷골목 브루클린에서 암울하게 살다 요절한 흑인 천재화가」식의 슬픈 신화를 기대하는가. 그러나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1960∼88년)는 이런 기대를 배반한다.

중산층 출신의 이 천재는 흑인의 정체성을 흑인의 눈으로 흑인답게 표현했다. 뉴욕 화상들의 상업주의 덕분에 죽을 무렵엔 호강도 했다. 뉴욕의 지식인, 예술가와도 격의없이 지내며 그는 자신이 찰리 파커나 행크 아론 같은 흑인영웅이 됐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는 영웅이었다. 뉴욕 화단에서 인정받은 첫번째 흑인화가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불행한 예술가 혹은 흑인이 그렇듯 마약으로 죽었다. 세상과의 여전한 단절을 느끼며.

살아서는 세상과 단절을 절감했을지라도 그는 죽어서 영원한 삶을 얻었다. 그가 남긴 그림을 통해. 즉 「피렌체」 「베이비붐」 「큰 신발」 「잿물」 등, 대표작을 통해. 얼핏 어린아이들의 치기어린 낙서처럼 보이는 그의 작품은 그러나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짙은 사회성과 예술성을 담고 있다.

색을 먹인 거대한 화면, 거기에는 아프리카의 가면같은 얼굴을 지닌 현대의 이기적이고 도식적인 군상으로 채워져 있다. 인물은 그 주변에 배치된 각종 단어와 문구, 화살표와 눈금, 왕관 등 상징적인 표현과 대비되면서 내면은 텅빈채 잘난체하는 현대인을 비웃는다. 권투선수 슈가레이 로빈슨, 야구선수 행크 아론, 재즈연주자 찰리 파커와 냇 킹 콜, 흑인가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도를 연상시키는 콜라주된 팔 다리 등 분리된 신체, 미국 대중문화의 산물인 배트맨과 로빈, 워너브라더스의 로고 등 그의 그림에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반복돼 나타난다.

그림은 대부분 인종주의, 고립, 흑백차별, 환경오염, 정체성의 상실 같은 슬픈 문화에 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도발적 색채와 흑인 정서, 다양한 문화의 도상이 어우러져 생명감이 꿈틀댄다. 만화나 낙서같은 그림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를 접목시켰다는 평을 듣지만 같은 개념의 미국식 팝아트에 비해 훨씬 인간적이고 시원하다. 담벽, 캔버스는 물론 냉장고 샌드백 담요까지 그림의 바탕이 됐다.

「흑인정서의 번역가」 혹은 「고급 백인문화에 대한 열망을 삭히지 못한 사람」, 「뉴욕 미술의 상업성에 굴복한 아웃사이더」 등 여전히 상반된 평가가 내려지는 장 미셸 바스키아. 평가가 엇갈리기는 그가 존경했던 피카소나 살아서 친하게 지냈던 앤디 워홀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우리 나이로는 스물아홉에 죽었지만 미국에서는 고작 스물일곱해를 살다 갔다고 이야기한다. 영어와 스페인어를 구사했고, 독서광이었으며 사립가톨릭학교를 다니면서 드로잉이 취미였던 고급스런 흑인소년. 하지만 또래의 대부분 흑인소년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고등학교 때 가출을 하고, 학교를 중퇴했다.

이때부터 흑인정서를 낙서로 표현해내는 낙서화가로서의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워싱턴 스퀘어 공원 벤치에서 잠을 자고, 사람들에게 구걸도 했다』는 그는 정말 거지처럼 살았어도 때론 원시적으로, 때론 시적으로 흑인 정서를 풀어놓았다.하지만 그의 낙서는 소외된 자의 발언 도구, 그리고 대안예술로서의 낙서를 예술로 끌어 올리는 데 기여했다. 잘난 자들의 도시에 못난 자들이 휘갈려 놓은 낙서는 이때부터 예술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이다.

랩과 브레이크 댄스, 그리고 낙서로 표현되는 힙합문화에 빠져 있던 그가 뉴욕 화단에 진출한 것은 80년 6월의 「타임스 스퀘어 쇼」가 계기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해 애니나 노제이, 프레드 호프먼, 브루노 비쇼프버거, 래리 개고시안 같은 화상을 잇달아 만나게 된다. 83년 독일 카셀 도큐멘타, 83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가했고, 미국 유럽 일본에서의 순회전 등으로 화가로서의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상업적으로 성공했고, 작품의 질도 좋아졌다. 하지만 그의 한쪽 발은 영웅주의와 상업주의의 깊은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작품에서는 차츰 평범한 흑인의 고단한 삶이 나타나지 않았다. 재즈를 사랑한 「딴따라」 흑인화가. 흑인의 정체성을 생각했지만 상업미술의 세례 덕분으로 아르마니양복을 입고 그림을 그렸던 화가. 그의 예술의 천재적 완성도와 그와는 상반된 이지러진 인생행로는 미국에서 산다는 것, 흑인예술가로 산다는 것, 혹은 인생 자체의 의미를 반추하게 한다.<박은주 기자>

◎그림에 흐르는 재즈의 깊은 선율/흑인 재즈뮤지션 모티브/음악적 이미지 시각표현

바스키아의 그림은 재즈의 시각적 산물이다. 어릴 때부터 밥먹듯 봐온 브루클린거리, 더 정확히는 뒷골목의 재즈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지하철 또는 길거리 벽에나 어울릴 낙서, 아니 그림은 재즈바의 체취 바로 그것이다. 퀘퀘한 실내, 자욱한 담배연기를 뚫고 솟아 오르는 신들린 선율과 환호…. 재즈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지는 어떤 풍경을 그는 팝 아트적으로 표현했다. 재즈란 그에게 결국, 근원적 표현욕구 또는 절규다.

86년 아크릴과 콜라쥬로 그린 작품 「재즈」를 보자. 재즈 또는 찰리 파커 등 그가 사랑했던 모티브들이 화면 곳곳에 천진스럽게, 마치 담벼락의 낙서처럼 살포돼 있다. 말하자면 유토피아로 들어가기 위한 주문이다.

그는 종종 작품 속에 존경하는 흑인의 이름을 서투른 어린이필체로 써 넣었다. 말콤 X, 랭스턴 휴즈, 제시 오웬스 등 흑인지도자들이 빠질 리 없다. 그렇지만 그들보다 더 많은 수의 흑인재즈뮤지션 이름이 나란히 나열돼 있음을 보게 된다. 마일스 데이비스, 디지 길레스피, 찰리 파커, 맥스 로치, 루이 암스트롱, 빌리 할러데이, 냇 킹 콜….

특히 찰리 파커를 향한 바스키아의 태도는 흠모의 경지다. 작품 곳곳에서 파커의 이니셜 「CPRKR」을 확인할 수 있고, 「코코(Koko)」 「때는 지금(Now’s The Time)」 등 대표곡의 제목이 촘촘히 들어차 있다. 바스키아는 그림만이 아니라 재즈에서도 미국 흑인들의 가슴속에 스며있는 것이다.<장병욱 기자>

◎내달 16일까지 갤러리현대서 전시

10주기를 앞두고 갤러리현대(02―734―6111∼3)가 15일부터 8월16일까지 마련하는 「바스키아와 콘서트」전은 요절한 흑인천재화가의 세상을 향한 절규와 메시지를 느껴보는 기회이다. 특별행사로 전시기간 중 매주 금요일 하오 8시에는 갤러리현대 야외주차장에서는 황신혜밴드, 트라이빔 등이 출연하는 작은 콘서트도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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