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주는 ‘큰 말’이 있나 소화된 지식을 담았나 지행합일 믿을 수 있나 따져보아야 한다말은 인간을 신과 동물로부터 구별하는 징표다. 말 한마디가 화와 복을 갈라놓고 정치인의 말은 그 개인은 물론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특히 말은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수사학이 최초의 정치학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교과서에는 보통 정치적 자원으로 경제력, 폭력, 상징력이 거론되는데 나는 이들을 알기 쉽게 돈과 칼과 말이라 부른다. 돈은 정치의 핏줄이기도 하지만 돈 정치의 폐단 또한 너무나 크다. 칼은 전쟁, 혁명, 쿠데타에서 보듯이 권력을 잡는 결정적 수단으로 쓰이지만 엄청난 저항에 부딪혀 결국 물리적 힘의 악순환을 불러온다.
그런데 돈과 칼은 타자로부터 빌릴 수도 있고 얻을 수도 있지만 말은 자기 것이 아니면 생명력이 없다. 그러기에 말은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의 최우선 순위의 자질이다. 바야흐로 우리는 말 정치의 시대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TV토론이나 합동연설회에서 말로 판가름이 나고 대세가 뒤집히기도 한다. 그런데 이때 말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좋게 평가하는 것은 대체로 그 말에 공감하고 좋은 인상을 받았을 경우이다. 그런데 요즈음처럼 정책이나 이념의 차이가 뚜렷하지 않을 때는 정치인의 말을 평가하는 기준이 지극히 모호하다. 우리는 머지않아 21세기 한국, 그것도 난제와 악재로 가득차 있는 이 나라의 중심을 바로잡고 방향을 제시해 줄 믿음직한 대통령을 선택해야 한다. 여기서 나는 대선을 향해 뛰고 있는 사람들의 말의 정치를 바로 읽는 기준 몇 가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첫째,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큰 말」이 있어야 한다. 이 큰 말은 우리가 보통 신화나 비전이라고 부르는 말이다. 학술용어로는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조직상징이라고도 한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신화나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는 큰 말의 범주에 들어간다. 히틀러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획득했지만 그의 신화는 합리성을 결여했고 독일국민의 이익에도 부합하지 못했다. 박대통령은 쿠데타로 권력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의 근대화는 시대를 선취한 큰 말이었고 그 결과는 반대자를 포함한 대다수 국민에게 이익을 제공했다. 국민을 통합하고 개개인의 삶에 이익을 줄 수 있는 큰 말은 미사여구의 짜깁기나 유행어의 나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투철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는 최고의 상징이요, 이념인 것이다. 여야를 통틀어 봐도 아직 60, 70년대의 산업화나 80년대의 민주화 만한 큰 말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정보화를 제시할 경우도 그 정보화 과정의 추진프로그램과 그 결과 국민이 향수할 수 있는 이익체계의 청사진을 실감나게 표출하지 않고 있다.
둘째, 소화된 지식을 전달하는 말이라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까지 들어간 한국의 지도자라면 이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안심할 수 있는 식견과 설명능력이 있어야 한다. 영어를 잘하면 편리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이다. 앞으로는 우리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내정과 외교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력이 없으면 대통령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참모가 써 준 것을 겨우 읽는 정도나 시험 공부하듯 외워 소화불량상태에서 외쳐대는 말은 불안하고 위험하다. 정서적인 웅변이나 임기응변의 말솜씨에서는 신뢰성을 찾기 어렵다. 문제를 제대로 파악한 소화력과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갈 수 있는 강한 신념이 배어있는 말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
셋째, 행동으로 확인될 수 있는 말이라야 한다. 지행합일은 동서고금의 금언이다. 그러나 정치인의 공약은 공약인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최소한 공약을 가장 적게 할 사람을 판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세상에는 청산유수처럼 매끄럽게 말을 하는 사람이 실약을 밥먹듯 하는 경우가 있고 눌언의 소유자가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달변과 눌변으로 지도자를 평가할 것이 아니라 말속에 배어 있는 신뢰감을 찾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비전이나 탁월한 식견도 행동으로 확인되지 않으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행일치의 가능성을 무엇으로 판단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과거 그가 속해 있던 조직에서 지도자로서 구성원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그 조직을 개선하는데 기여한 경험이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지름길이다. 이러한 기본조건을 갖춘 사람의 말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호언장담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게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가의 말은 비전과 식견과 실천의 메시지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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