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악 중국에 못지않다” 각별 애정/편경시연회서 경돌의 음차이 정확히 집어내 박연도 깜짝/‘황종율관’ 기본음 바탕 편종 등 각종 악기 제작/세종실록 실린 아악보 현존 동양 최고의 악보세종 9년 1427년 5월 편경이 완성됐다.
경복궁 뜰에서 시연회가 열렸다. 당대의 악성 박연의 표정에서는 자긍심이 피어올랐다. 이윽고 아득하고 깊은 소리에 이어 차고 맑은 소리가 초여름의 산뜻한 공기를 갈랐다. 순간 조용히 귀기울이고 있던 세종(당시 31세)은 연주를 중지시켰다. 『중국의 편경은 조율이 정확하지 않은데 박연은 참 잘 만들었다. 경돌을 얻은 일도 다행한 일이려니와 이 돌로 만든 편경의 소리는 맑고 고우며 조율도 퍽 잘 되었다. 그런데 이칙(동양 12음계 가운데 9번째 소리)의 경돌이 좀 높으니 어찌 된 일인가?』
『아니, 그럴 리가…』 박연의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렀다. 세밀하게 조사해보니 이칙의 경돌을 만들 때 그어놓은 먹줄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는 부분이 있었다. 치수대로 돌을 다 갈지 않았던 것이다. 박연은 곧 그 경돌을 먹줄이 갈릴 때까지 더 갈아냈다. 그러자 바로 정확한 음이 나왔다. 미세한 음의 차이를 잡아낸 대왕의 음감에 당대의 천재 박연도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편경은 틀에 경돌 12개를 매달아 침으로써 소리를 낸다. 동양음악 연주에서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악기다.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 보내준 몇 틀이 전부로 그나마 오래돼 음이 잘 맞지 않았다. 시연회에서 선을 보인 편경은 조선에서 처음 발견된 경돌로 만든 것이었다. 이 악기제작을 위해서는 고금의 음악에 두루 통달해야 할 뿐 아니라 우선 기본음이 되는 황종율관이 필요했다. 황종율관의 기본음이 있어야 편경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은 음악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의 음악은 소리를 매체로 한 예술이라는 서양적 의미의 「뮤직」과는 사뭇 달랐다. 유교적 이상정치 이념으로 볼 때 음악은 인간의 심성을 순화시킴으로써 예로 돌아가게 하는 고도의 윤리·정치적 수단이었다. 대왕이 동양 고전음악인 아악과 우리 전통음악인 향악을 정리, 창작한 것은 『임금은 나라를 평정한 뒤에는 음악을 제정하고, 백성을 편히 살게 한 뒤에는 예를 마련한다. 그러므로 나라를 평안케 하는 공적이 커지면 악을 갖추게 되고, 군왕의 다스림이 백성을 골고루 편하게 하면 예를 갖추게 된다』고 하는 철학을 실천하는 일이었다.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박연을 음악정리를 담당하는 악학 관습도감의 총책임자로 삼았다. 박연은 세자교육기관인 시강원 문학(5품직)으로 있을 때부터 당시 세자인 대왕과 학문적 교분이 두터웠고 세종은 그의 음악적 재능을 익히 알고 있었다. 박연의 주도로 세종시대 음악적 업적이 하나 둘씩 쏟아져 나왔다. 조회나 회례때 쓰는 아악과 종묘·사직·문묘 제사때 사용하는 아악을 정리·제정했다. 공자를 모신 사당에서 제사(석전제)때 쓰는 문묘제례악은 중국에서도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문헌을 토대로 재현에 성공, 한국은 물론 동양음악사에 길이 남을 귀중한 음악유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편경 편종 등 아악기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냈다. 음의 장단까지 기록하는 정간악보와 오음악보·합자보 등 기보법을 창안, 많은 악곡을 기록으로 보존할 수 있게 했다. 세종실록 136권부터 147권까지 실린 아악보는 현존 동양 최고의 악보로 음악을 향한 박연의 열정과 임금의 애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영남대 송방송 교수는 지난 5월 「탄신 600돌 기념 21세기 문화·과학을 위한 세종대왕 재조명」 세미나에서 『정간보는 세종조 및 그 이후의 수 많은 악곡을 후대에 전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정간보의 등장은 세계음악사적으로도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세종은 특히 우리 고유의 음악인 향악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박연을 비롯한 문신들이 지나치게 아악정비에만 몰두하자 대왕은 이렇게 일침을 가한다. 『우리나라의 음악이 다 잘 됐다고 할 수는 없으나 중국에 비해 부끄러울 것은 없다. 중국의 음악이라고 어찌 다 바르게 됐다고 할 수 있겠는가?』(세종실록 12년 12월7일조). 한 때는 맹사성 등이 조회뿐 아니라 회례의식에서도 아악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하자 『중국의 음악을 쓰고자 하여 향악을 다 버리는 것은 단연코 불가하다』(세종 13년 8월2일)고 못박았다.
그 자신 탁월한 음악가였던 대왕은 봉래의 보태평 정대업과 같은 곡을 직접 새로 짓기도 했다. 이 창작곡들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뛰어난 작품으로 살아 있다.<이광일 기자>이광일>
◎돋보기/박연/음악적 자질 타고나 세종 총애 ‘한몸에’/피리명인 놀라게한 연주솜씨 일화 유명
세종시대의 음악정비는 박연(1378∼1458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성종 때 편찬된 「악학궤범」 서문은 『그 때 음악을 맡은 사람은 다만 박연 한 사람뿐이었다』는 말로 그의 절대적인 역할을 암시하고 있다.
박연은 태종 때인 1411년 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 교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다. 이후 세종의 명으로 음악정비에 모든 힘을 기울이게 된다. 음악분야에서도 대왕은 인물을 알아본 것이다. 세종이 박연을 총애하자 다른 신하들이 그를 헐뜯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대왕은 못들은 체하고 박연에게 전권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각종 악기요, 악보요, 아악이었다. 그의 음악적 자질은 타고 난 것이었다. 이런 얘기가 전한다. 과거를 보러 서울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궁중 음악기관에 있는 피리의 명인에게 자신의 솜씨를 물었다. 『제법 천품은 타고 났지만 속되고 격에 맞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박연은 한 달 더 연습한 끝에 나중에는 『이제 나도 그대의 피리소리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평을 듣게 됐다. 예문관 대제학(정2품)에까지 오른 그의 생애와 업적은 후손이 편찬한 「난계(박연의 호) 선생유고」에 상세히 전한다.
◎세종 어록
『사람의 목숨이 지극히 중하므로 사람을 죽인 자는 죽여야 한다. 그러나 죄가 의심나는 경우는 이를 용서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세종실록 54권 13년 10월30일조, 현대적 의미의 증거주의를 말한 대목이다).
『여러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을 어찌 나 한 사람이 다 알아서 정밀하게 살필 수 있겠는가? 경들이 임금 앞에 나와 여러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논하지만 순식간에 어찌 그 실상을 알 수 있겠는가? 경들이 물러가 앉아서 마음을 침착하게 가지고 사람들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에 대해 아주 자세히 살피고 되풀이 생각한 후에 나도 다시 살펴서 선택하겠다』(실록 54권 13년 11월5일조, 대왕이 인재 발탁에 심혈을 기울이는 자세가 이와 같았다).<이광일 기자>이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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