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못채우는 ‘인생’철학자 박이문(포항공대 교양철학부 교수)씨가 수필집 「철학의 여백」을 냈다. 「시와 과학」 「현상학과 분석철학」 등으로 암울했던 80년대초 대학가에 철학바람을 일으켰던 그가 어느덧 예순여덟의 할아버지가 됐다. 그런 연륜 탓인지, 아니면 마르틴 하이데거(독일 실존주의 철학자)적인 수필을 지향하기 때문인지, 이 산문집 마디마디에서는 예의 칼끝같은 날카로움은 안으로 스며들었다. 대신 물결같은 잔잔함이 일렁인다. 주제도 그렇다. 「고향」 「스무살의 독서」 「수치심」 「관용」 「마음의 쓰레기」 등 철학으로 채우지 못하는 삶과 경험을 여백으로 그렸다.
「공과의 만남」(114쪽)이란 글에서 그는 비판과 언어분석과 메타이론으로 무장한 철학자의 종교에 대한 애정을 털어놓기도 한다. 『시골 한학자 집안에서 자란 나는 어린 시절 좁은 뜻의 종교 밖에서 살았다. 내가 어려서 살아온 세계에는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대한 신념은 있었지만 절대자에 대한 기도나 형이상학적 실체에 대한 명상을 위한 시간이나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도 나는 회교도, 기독교도, 불교도,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요즈음 나는 그 뜻을 전혀 모르면서도 목탁을 치며 크게 불경을 외우는 스님들의 청량한 목소리를 듣기 좋아한다. 나는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말없이 기도하는 삶들의 경건한 모습을 볼 때 스스로 흐뭇함을 느낀다… 깊은 골짜기 아름다운 숲속 깊이 자리잡은 한국의 절로 들어가는 긴 길을 걸어가면서 불교적 공과 만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나는 해방감과 기쁨으로 가득찬다』 문학과 지성사 발행, 6,000원.<이광일 기자>이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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