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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사명대사의 선차 깊은 향이 넘실(차따라: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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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사명대사의 선차 깊은 향이 넘실(차따라:10)

입력
1997.07.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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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차·사명다도를 일본에 남긴 구국영웅 고승 사명대사/그는 또한 ‘차의 달인’이었고 그의 고향 밀양은 예로부터 작설차와 차겨루기대회로 수백년 이름높던 다의 본고장이다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 국곡산 아래 지방기념물 116호인 사명대사(1544∼1610) 생가터 성역화 사업이 한창이다.

3,200여평의 땅에 사당과 삼문, 정침 사랑채 대문채 관리사 주차장 화장실이 날아 갈 듯한 기와집으로 속속 들어서고 있다. 총 22억여원이 드는 이 사업은 내년이면 마무리된다.

시가 나름대로는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사업이지만 밀양 차인들은 규모나 내용면에서 기대 이하라는 평이다. 밀양 차인들에게 사명대사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고승이자 임진왜란의 구국 영웅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밀양이 낳은 영웅」이기도 하지만 다성으로 추앙받아 마땅한 「차의 달인」이었다는 게 밀양차인들의 주장이다. 일본에 「사명」이라는 이름의 차와 사명다도를 남길 정도의 경지였다는 것. 따라서 이왕 성역화 사업을 할 바에는 사명대사를 다성으로 모시고 그의 민족혼과 차향을 되살릴 수 있는 성역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성역화 작업과 더불어 부쩍 기세가 오르고 있는 사명대사 다성 추앙 운동은 한편으로 과거 밀양차의 영광을 되새겨 보려는 운동으로도 이해된다. 밀양에서 「차향가」라는 이름으로 차모임을 이끌고 있는 단군교 경남본부 한솜 선님은 밀양은 특별히 차와 깊은 인연이 있는 땅임을 강조했다.

『조선말 이후 밀양의 차는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쇠퇴해 버렸지요. 그러나 다죽리와 다원동, 엄광사터의 차밭이 있던 다촌, 사명대사 생가터 바로 옆마을인 차례리 등 밀양에는 유난히 차와 관계된 지명이 많습니다. 또 고려말 익재 이제현을 비롯, 점필재 김종직과 사명대사에 이르기까지 밀양 출신의 이름난 차인들이 많았습니다. 밀양이 차의 본향이기 때문이지요. 세종실록 지리지는 작설차가 밀양의 명산품이라고 했고 밀양의 명물인 영남루는 고려때부터 차겨루기가 열렸던 차누각이었습니다』

사명대사와 밀양의 인연은 이래저래 깊다. 태극나비, 얼음골과 함께 밀양 3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표충사 사명대사비. 나라에 위난이 닥칠 때면 땀을 흘린다는 이 비석의 주인공인 사명대사는 차와의 깊은 인연을 보여 주는 발자취를 곳곳에 남겼다.

그의 본명은 임유정.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알밤을 주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부가 잡은 자라가 불쌍해 친구들의 밤까지 모두 어부에게 건네 주고 자라를 사서 물속으로 돌려 보냈다. 타고난 선근이었다. 할아버지에게 역사를 배우고 스승에게 맹자를 배웠으나 15세때 『그까짓 천한 속학은 배워서 어디에 쓰겠느냐』며 황악산 직지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18세에 선과에 급제해 당시 글줄이나 한다는 유생들간에 화제가 됐다. 박사암 등 재사들이 그의 문장을 시험하려고 그를 불렀다. 까까머리를 보고 놀려 댔다. 「승두단단한마고」(중머리는 둥글둥글해서 마치 땀난 말 불알 같구나). 즉시 붓을 들어 갈긴 것이 「유자첨첨좌구신」(선비들 상투는 뾰죽한 것이 마치 앉아있는 개 뭐 같구나). 그제서야 선비들은 그를 예사로 여기지 않고 교류를 텄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칼을 들었다. 수백명의 승병을 이끌고 서산대사 휘하에 들어 가 왜군과 맞서 싸워 잇달아 전과를 올렸다. 적진으로 들어가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를 만났다. 기요마사가 물었다. 『조선에는 보물이 많다는데 대체 어떤 보물이 있는가』

사명대사의 대답은 가토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우리나라에는 별다른 보물이 없소. 오직 당신의 목을 제일 큰 보물로 여기고 있을 따름이오. 당신의 목에는 천금의 상금이 걸려있으니 어찌 더 큰 보물이 있겠소』

선조 37년(1604년)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건너 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1542∼1616)를 만나 강화조약을 맺고 이듬해 잡혀 갔던 3,500명의 동포를 이끌고 귀국하면서 한 수 시를 읊었다. 『…북극에 저문 구름 해와 함께 떨어지고/ 동주로 돌아가는 길 하늘과 더불어 길구나/ 황금빛 귤은 얼굴 무늬 옷 차림 아이를 볼 때마다 선사하고/ 푸른차를 이 물들이기 때를 맞춰 맛보네/ 일을 성취하고 많은 백성 이끌고 돌아오니/ 가을 바다에 돌아오는 큰 배 뜻대로 띄우리』

「푸른차(청명)」는 끓인 물속에 볏짚 잿물을 넣고 우려낸 차를 가리킨다. 「이 물들이기(염치)」란 식초나 차즙에 담근 쇳조각에서 우러난 갈색의 염료로 이를 검게 물들이던 당시 일본의 풍속이다.

승려시인이자 차문화 전문가인 대구 파계사 석성우 주지스님은 『사명대사가 일본에 머물 때 스님 곁에서 차시중을 들었던 차각이 사명대사의 차드시는 모양을 흠앙해 그 차법을 전했다』며 『일본 사찰에서는 지금도 쉽게 사명다도를 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명대사는 차향이 짙은 시도 여럿 남겼다. 「모이고 흩어짐이 속세의 인연/ 바다 동쪽 어디가 이 자리와 같으리오/ 봄 정자에서 선차를 달여 마시니/ 푸른 풀 안개낀 꽃 눈앞에 가득하구나/ 황정을 손에 들고 신결을 묻고자/ 멀리 바다 건너 신선의 문 두드렸네/ 사미 불러 차 석잔 내 오니/ 동원의 종풍 예와 같구나」

「조계를 이어 나온 백대의 후손/ 행장이 이르는 곳마다 사슴과 벗을 삼네/ 옆 사람들아 헛되이 날을 보낸다 하지 마오/ 차 달이는 여가에 흰구름을 본다네」

선차의 깊은 향이 넘실거린다.<김대성 편집위원>

◎알기쉬운 차입문/너무 뜨거운 물에 차 우려내면 맛떫고 향기 사라져 물 ‘뜸들이기’ 필요

우리 잎차를 담은 차통에 붙은 설명서에는 한결같이 물을 먼저 100도로 끓인 후 70∼80도로 식혀서 차을 우려내라고 씌어 있다.

왜 물을 끓였다 식히라는 것일까. 물을 끓이는 것이 가장 손쉬운 살균법이다. 세균에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다. 반면 너무 뜨거운 물에 차를 우려내면 탄닌 성분이 먼저 우러나와 차맛이 떫어지고 차 특유의 향기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그러나 왜 따로 살균을 하지 않아도 되는 청정수를 끓이지 않고 70∼80도로 데워서 차를 우려내면 안되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해답을 듣지 못했다. 물을 끓이면 오히려 물맛이 상하지 않겠느냐는 의문도 있을 수 있다. 전문가 들은 굳이 물을 끓였다 식히는 과정을 「물뜸들이기」라고 설명한다. 맛있는 밥을 지으려면 일단 끓여서 쌀을 익힌 뒤 쌀이 잘 퍼지도록 뜸을 들이듯 물도 뜸을 들여야 제맛이 난다는 것.

차를 다 마시면 찻잎을 건져 내고 찬물로 차주전자를 씻는다. 차주전자 안에 남은 차 잔류물이 따뜻한 온도 때문에 부패할 수도 있다는 꼼꼼한 생각 때문이다.

이렇게 청결함을 강조하다 보면 비누나 합성 세제로 차그릇을 닦으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찻잔에 비눗물이 스미면 그 냄새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결국 차를 마시는 게 아니라 비눗물을 마시는 셈이 되기 때문에 삼가야 한다. 대신 차그릇은 처음 쓸 때는 물론, 사용하면서도 종종 삶아 주어야 한다. 그래야 잡내나 군내가 배지 않는다.

청결한 차생활을 하다 보면 문득 주변의 누추함과 번잡함에 눈뜨게 된다. 그 누추한 일상을 정갈하게 다듬은 것 또한 차생활의 묘미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 삶이 맑은 차향기를 담을 수 있는 정갈한 찻잔으로 바뀔 수 있다.

차 한잔을 마주하는 것은 삶의 향기를 담아 내는 일이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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