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에 교수민주화운동? 그것도 50년사? 이런 명제가 성립될 수 있을까?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면 학생들의 것인데? 그럴 것이다.그런데 한국 50년 현대사에서 민족이 부대껴 오는 세월에 지식인이나 교수가 매양 아픔과 동참이 없이 지내올 수 있었을까 하는 소박한 성찰이 서울대 개교 50주년에 즈음하여 제기해 본 물음이다.
작년 10월에는 서울대 개교 50주년 기념행사를 몇개 치렀다. 기념행사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서울대학교 50년사 상·하」 두권을 발간하여 대학사의 뼈대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와는 별도로 「서울대학교 교수민주화운동 50년사」도 하나 만들어 내야 한다는 생각이 기획을 맡은 쪽과 그러한 문제의식을 지닌 교수들 사이에 교감되어 이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필자 자신이 57년도에 입학하여 이 학교의 50년사중 약 40년을 함께 해왔지만 입학이전 약 10년의 역사가 마음에 걸린다. 서울대학이 국립대학이라면 개교 당시 미군정청에 의해 국립대학 설치안이 나왔을때 「국대안」을 둘러싸고 벌어진 소용돌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대가 설립되자 당시 예정된 교수들 중에서 약 5분의 4에 해당하는 380여명이 들어오지 않고 떠났으며 1,000여명의 학생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 떠난 교수들이 당시 민족자주국가 건설에 대해 어떠한 구상과 희망을 품었는지, 그리고 그 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그 꿈을 실현하려고 했는지를 적은 기록이 거의 없다. 그들의 행방에 대한 자료도 없다. 그래서 당시의 사정을 잘 아는 이야기꾼이 필요하였는데 그런 분도 찾기가 난감하였다.
곧 한국전쟁이 있었던데다 시간이 꽤나 지났기때문에 우리는 해방으로부터 10여년에 걸친 역사의 뒤안길을 말해줄 이야기꾼이 필요하였다. 지난 세월에 대한 자료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세세한 사건의 전개와 그 역사적 의의가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시기별로 그러한 이야기꾼을 찾아 이야기를 수집해야할 필요성도 느꼈다.
한국 민주화운동사로 보면 4·19혁명은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교수들이 그 4월 혁명에 기여한 면모는 한 장의 귀중한 교수 데모사진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민주화를 재건하는데 도움이 될 발언도 많이 나온 귀중한 시기였다. 한 교수는 대학신문에서 학생들은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연구회도 만들고 운동단체도 만들어 미래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데 막상 교수들은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들지 않고 방관만 한다고 질책했다. 또한 더욱 넓어지고 긴밀해지는 세계적 상황에 대비해서 학문과 연구의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지금 우리에게 하나의 경고인듯 들린다.
아무래도 대학의 자율적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5·16군사쿠데타와 그로 이어지는 장기적 군사독재체제가 미친 역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4·19후에 5·16이 너무 빨리 옴으로써 4·19가 갖는 변혁적인 운동성이 너무 빨리, 쉽게 시들었고 8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그 내용이 풍부해졌다.
대학과 교수의 자율화 몸짓은 「국대안」 당시부터 시작된 과제이다. 이를 위해 매 시기마다 교수들은 대학 내외의 개혁을 위한 발언을 해왔다. 사실 4·19혁명을 기준으로 해보더라도 강한 발언과 주장을 한 교수들이 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실제 생애에서는 그러한 주장과는 아주 다른 성질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이 「50년사」에서는 조선조 후기 위대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이 「목민심서」를 작성할 때 그 치적의 좋은 사례를 뽑을 경우 당사자의 소속당파를 초월했던 자세를 본보기로 하였다.
한편 서울대에서는, 특히 80년대에 학생들의 목숨이 많이 희생될만큼 운동이 치열하였다. 아직 교정에는 이들을 추모하는 합동기념비를 세우지 못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교수민주화운동 50년사」의 머리글에서 밝혔듯이 학생운동도 우리의 귀중한 역사인 만큼 학생운동사도 만들고 기념비도 세워 자신을 성찰하고 앞날을 내다보는 터전으로 삼으면 역사를 바로 또한 풍부하게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고 본다.<사회학>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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