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담벼락·닳아버린 보도/고풍스런 집·정원 그리고 성당…/로마인들이 세웠고 영국인이 다시 건설한 도시/제인 오스틴의 문학향기가 있고 성공회의 역사가 깃들인 곳영국의 오래된 도시를 걷다보면 유쾌하면서도 때로 공연히 가슴이 뭉클해진다. 때가 낀 낡은 담벼락, 밟고 밟아 모서리가 닳아버린 보도의 돌 귀퉁이, 세상이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기 이전의 여유로움을 보여주는 고풍스런 집과 정원, 우아한 성당들이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신기한듯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 보면 시간의 흐름이란 이런 것이구나 깨닫게 된다. 아무리 불편해도 원형을 해치지 않으려는 영국인들의 고집에 존경심마저 생긴다.
남부의 바스(Bath)와 캔터베리(Canterbury)에서는 누구나 이런 기분이 든다. 단순히 얼핏 느끼고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푹 젖게 되는 것이다. 낡은 건물 사이로 새로 지어진 건물이 들어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다른 도시와는 달리 이곳에는 오직 과거만이 존재하는 듯 하다. 도시의 역사도 만만치 않지만 도시건설이 완성된 때의 모습에서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탓이다. 하나하나가 모두 역사다.
바스는 1세기경 로마인이 세운 도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옛날 이곳에는 거대한 공중목욕탕이 있었다. 19세기에 공사중 우연히 발견된 이 「로만 바스」는 대욕탕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방과 로마인 특유의 정교한 온돌시스템을 보여준다. 지금도 영국에서는 극히 드물게 섭씨 46.5도의 온천수가 나오지만 목욕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영국인의 특성 탓인지 관광을 위해서만 개방되어 있다.
바스의 전성기는 18세기. 17세기부터 번창하기 시작해 당시 내로라하는 멋쟁이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골목 곳곳에는 계단식으로 높은 보도블록이 눈에 띈다. 멋쟁이들의 옷이나 구두가 더러운 것에 묻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가이드 조이스씨는 『소설가 제인 오스틴이 가장 친숙해 했으면서도 가장 답답해 했던 곳이 바스』라고 들려준다. 10대 시절부터 바스와 인연을 맺은 그는 이따금 이곳에 머물며 당대 영국귀족의 사치와 허영을 공격하기 위한 소설의 소재를 찾았다. 못견딜만하면 골목골목을 헤매고 다녔다. 「제인 오스틴 바스 워크」라고 이름 붙여진 게이 스트리트나 바톤 스트리트의 골목길에서 문득 뒤돌아보면 긴 치마를 끌며 걸어가는 제인 오스틴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
바스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사람은 존 우드 부자다. 이들은 18세기 내내 완벽한 계획 하에 바스를 건설했다. 바스의 건물은 누런 외벽과 하얀 살을 댄 직사각형의 높은 창, 층마다 양식이 다른 기둥이 특징이다. 조지안 스타일로 불리는 당시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도시 이끝에서 저끝까지 일관된 모습이다. 먼곳에서 바라보거나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마치 영화세트나 놀이공원의 시설 같다.
캔터베리는 바스와 닮았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은 없지만 로마시대의 성벽이 남아 있는 것도 그렇고 시내 한복판으로 작은 강이 흐르는 것도 비슷하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도시의 분위기도 그렇다. 차이라면 캔터베리가 바스보다 역사적으로 중심에 가까왔다는 것과 누런 색 대신 어두운 회색이라는 것 정도다.
캔터베리의 역사는 영국성공회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꼭 1,400년전 성 오거스틴이 대성당을 세웠고 지금은 영국성공회의 대주교가 머무는 곳이다. 대성당 내에는 헨리 6세같은 역사적인 인물들이 묻혀 있다. 영국 최초의 소설인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로 더욱 유명하다. 지난해만 170만명의 관광객이 찾은 영국내 서열 4위의 명소이다.
그러나 캔터베리의 진면목은 인파로 북적이는 대성당은 아니다. 출입문이 옆으로 기울어진 400년 넘은 퍼브에서, 한걸음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호텔의 나무 계단에서 느낄 수 있다. 30년 가까이 캔터베리에서 살고 있는 김현기씨는 『웨스트 게이트 바로 너머 강가에 있는 나룻배를 타보라』고 권한다. 4파운드(약 6,000원)만 내면 사공이 기다란 나무봉으로 강바닥을 짚고 한참을 내려간다. 강둑 너머로 새파란 잔디와 「영국의 정원」이라 불릴 정도로 잘 가꾸어진 꽃밭, 그뒤의 허름한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더 나가면 전형적인 영국의 언덕 뿐이다. 도무지 지금이 언제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실감할 수 없다. 태초의 적막함과 평화로움이 이러했을까.
그렇지만 바스와 캔터베리는 「죽은」 도시는 아니다. 「옛 것을 팔아먹고 사는」 관광도시는 더욱 아니다. 낡은 건물 사이로 바쁜 듯 걸어다니는 20세기 사람들의 모습은 세계 어느 곳과 다르지 않다. 다만 조금 여유롭게 보일 뿐이다. 그건 아마도 그들 뒤로 서 있는 건물이 낯선 방문객에게는 역사의 흔적이지만 그들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살고 있는 「집」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의는 영국관광청 서울 사무소 (02)723―8266.
◎인근의 가볼만한 곳/윌리엄왕 사냥터 뉴포리스트/388㎢ 숲속에 위락시설 22곳/비치헤드·리즈성도 들러볼만
바스와 캔터베리에서는 도시 바깥으로 눈을 돌려도 볼거리가 많다. 근교로 조금만 벗어나면 또 다른 영국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바스를 거쳐 들러볼만한 곳은 뉴 포리스트(New Forest). 1079년 정복왕 윌리엄이 사냥을 위해 조성한 대규모 숲이다. 바스 한복판을 흐르는 에이본강을 건너 평야를 달리다보면 388㎢에 달하는 광활한 숲의 서쪽 경계에 다다른다. 차로는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놀랍게도 이곳은 1,000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견뎌낸 듯하다. 정복왕 윌리엄이 살아온다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같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오직 나무와 흙, 그리고 사람을 전혀 두려워할줄 모르는 야생마들 뿐이다. 그런가하면 숲 사이 사이에는 공원과 박물관, 매너하우스, 놀이공원 등 모두 22곳의 위락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연간 950만명이 찾아오는 국민휴양지답다.
1,000년의 숲이 남아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런던에서 불과 2시간 거리의 교외에 이처럼 넓은 숲을 개발하지 않고 보전한다는 사실이 한 뼘 땅이 아쉬운 한국인에게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캔터베리 가는 길에는 비치 헤드(Beachy Head)와 리즈(Leeds)성을 빼놓을 수 없다. 비치 헤드는 캔터베리에서 1시간 거리의 해안절벽. 맑은 날에는 일곱굽이의 깎아지른 절벽 너머로 프랑스 땅이 아스라이 보인다. 영국 젊은이의 자살장소로도 유명하다.
부산의 태종대처럼 주변의 대자연은 인간의 왜소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바다에서 눈을 돌리면 언덕은 온통 꽃무더기. 바닷 바람에 잔잔하게 흔들리는 작고 하얀 들꽃은 마치 눈이라도 내린 듯하다. 다른 언덕에는 11월1일 영국 현충일에 2차대전 무명용사들에게 바치는 새빨간 포피(Poppy) 꽃이 피라도 뿌린듯 장관이다.
리즈성은 12세기 정복자인 노르만 귀족에 의해 세워졌다. 헨리 1세 이후로는 대대로 영국왕실 소유였다. 강 한가운데 벽돌로 쌓아올린 건축물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견고하기 이를데 없으나 성을 둘러싼 자연경관은 부드러운 선과 아름다운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 또한 방마다 볼거리다. 중세의 왕궁이다. 영국인들은 리즈를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이라고 자랑스레 부른다. 매너하우스와 마찬가지로 일반에게 공개되며 매년 6월 벌어지는 대형기구쇼 「벌룬 페스티벌」과 19세기말의 고전적 자동차를 볼 수 있는 「빈티지 카 퍼레이드」도 놓치깅 아까운 이벤트다. 성너머 마당 끝의 온실도 가볼만하다. 영국의 가정에 어울릴법한 작고 아름다운 화초도 살 수 있다.<캔터베리(영국)=김지영 기자>캔터베리(영국)=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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