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보다 상술 우선/반짝스타들 양산 보여주기 급한 TV/신세대 감수성 잠식뿐모든 것이 붕어빵의 역설을 닮아간다. 정치엔 정치가 없고, 음악엔 음악이 없다. 97년 여름의 이 지점에서 우리의 대중음악에 음악의 순정을 기대한다는 것은 이미 허망한 일일지도 모른다. 끝없이 이어지는 한탕주의에 입각한 표절파동에 우리 대중음악은 이미 심각한 내상을 입었으며 살인적인 시청률 경쟁과 이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매니지먼트에 의한 인위적인 인기전술은 다양한 음악장르와 다양한 세대적 감수성의 토대를 갉아먹은지 오래이다. 확실한 통계는 아니지만 지난해에 쏟아진 한국 대중음악 음반 중에 최소한 재생산의 기준이 되는 「손익분기점」을 넘어선 음반의 비율이 5%미만이라는 사실은 거의 경악에 가깝다. 이정도 확률이라면 음반산업은 산업이 아니라 경마장에 가는 것보다도 열등한 투기에 불과하다.
음악적 재능에 대한 최소한의 검증도 거치지 않은 신인들도 오로지 매니지먼트에 의해 단숨에 한 국가의 「스타」를 꿈꾼다. 한두곡 히트시킨 작곡가들 앞에 철새 제작자들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한 곡의 의뢰비가 거의 1,000만원에 육박한다. 음악적 특성과는 상관없이 너도 나도 유명연주자에게 몰리는 바람에 제작비는 제작비대로 뛰고 재능있는 연주자들은 매너리즘에 빠지며 음반은 음반대로 아무런 색깔없이 그저 재킷에 유명한 이름만 번쩍이는 채 시장에 던져진다.
음악을 포장하는 다른 요인들이 음악 그 자체를 이미 잠식했음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제작한 자신의 독집음반을 나란히 차트의 1,2위에 올려 놓는 기염을 토했던 안재욱의 신드롬에서 지겹도록 보았다. 그리고 이 후덥지근한 여름, 우리는 또다시 댄스뮤직이라는 계절 상품의 홍수 속으로 밀려가고 있다.
댄스뮤직이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주류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만용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서태지와 아이들, 혹은 김건모때와 같은 열광은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실제로 최후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음반시장에서 댄스뮤직 앨범은 압도적인 종수에 비해 판매고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왜일까? 무엇이 이 거침없는 신세대의 음악 감수성을 무력하게 만든 것일까? 성수기를 겨냥하여 발매된 김지현의 솔로전향 앨범과 작년에 이어 올해 여름도 자신의 시즌으로 장식하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 클론의 두번째 앨범, 그리고 연속안타를 노리는 영턱스클럽의 신작과 이미 여론의 폭격을 맞고 화면에서 퇴장한 DJ DOC의 싱글앨범을 함께 검토해 보자.
댄스뮤직계의 패권주자들이 내어놓은 이 앨범들은 각자의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 나름대로 피와 땀을 쏟았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앨범들엔 바로 그 주인공들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들은 그들이 성취한 매력의 매너리즘에 그대로 갇혀 있다. DJ DOC은 지난해 「미녀와 야수」로 저질가사 파문을 재발시켰으며, 클론은 「꿍따리 샤바라」의 강력한 성공에 이어 또다른 복고리듬을 재생시켜 여전히 「이 여름에 도시를 탈출하자」고 외치고, 영턱스클럽은 전가의 보도가 된 트로트댄스를 재탕해 낸다. 룰라 시절부터 섹스어필을 무기로 삼았던 김지현은 자신의 빈약한 보컬을 아예 이승희가 나비처럼 날아와서 벌처럼 쏘고 간 누드라는 새로운 충격요법으로 보완하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가정해 보자. 만약 TV의 오락프로그램과 황색 저널리즘이 없다면 이 노래들은 노래의 힘만으로 얼마의 구매력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인가? TV는 모든 것을 재빠르게 보여주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 리듬들의 반복적인 융단폭격은 열광적인 수용자들을 양은냄비로 만들었고 음악적 경험의 신비를 파괴시켜 버렸다.
게다가 소모적인 시청률경쟁은 댄스뮤지션들의 생존주기를 극한적으로 단축시켰다. 이들은 최소한의 재충전의 여지도 없이 옷만 바꿔입고 입을 벌리고 몸을 흔들어야 한다. 댄스뮤직의 구매력저하는 자승자박이다. 아마도 머지않은 미래에 댄스뮤직을 사랑했던 수용자와 기획자들은 바로 그들이 그토록 매달렸던 방송사의 프로듀서들이 그들의 텃밭을 망쳐놓았음을 한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방송사 건물 앞의 해바라기에 불과했던 자신들의 무능력을 뼈저리게 되뇌일 것이다.
음악은 음악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 음악인이 음악으로부터 소외되고 시각매체의 종사자들이 그저 새로운 이미지에 저당잡힌다면 우리는 아마도 머지않은 미래에 한국 대중음악의 실종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최후의 열쇠는 매너리즘에 대한 수용자들의 반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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