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1차회의후 정례화 혼신/남측 최 회장 남북 오가며 중재/1년반 노력끝 5월 예비접촉한국일보사가 95년의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에 이어 성사시킨 「한반도 평화와 화합을 위한 모임」은 1년반여의 노력이 거둔 결실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남북신뢰회복추진협의회 최봉구 회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최회장은 95년 12월 이미 평양을 방문했고 96년 8월 평양 방문때 남북간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학술회의와 같은 모임이 절대 필요하다는 점을 북한당국에 역설, 북한당국자를 실무예비접촉에 응하게 했다.
한국일보사는 분단사상 처음 열려 대내외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95년의 남북학술회의 때부터 이같은 학술회의를 정례화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95년 8월1일 밤 베이징(북경)의 한국음식점 사이트아리랑에서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 참석자들이 석별의 정을 아쉬워하며 송별연을 가졌을 때 학술회의를 정례화하자는 제의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물론 북한측 참석자들은 이에 대해 구체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일보사는 첫 학술회의 결과를 책자로 펴낸 96년 봄부터 제2차 학술회의개최를 적극 추진했다. 최회장이 학술회의 성사에 팔을 겉어 붙이고 나선 것도 이때부터. 최회장은 남북관계를 개선하자면 상호간에 신뢰회복이 우선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상호교류가 첩경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국일보사는 최회장이 96년 8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결과를 수록한 책자와 당시의 사진 등을 북한측 당국자에게 전달했다.
북한측은 베이징 학술회의가 끝난 지 정확히 10일이 지난 95년 8월10일 중앙방송 상오 7시 뉴스를 통해 학술회의 개최사실을 알리면서 그 결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최회장은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당국자에게 제2차 학술회의를 열고 싶어하는 한국일보사의 의사를 직접 전해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북한당국자들은 한국일보가 공정하고 균형잡힌 보도를 하고 있다고 평가했고 제2차 학술회의를 한국일보가 주관한다는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96년 9월 발생한 북한의 잠수함 침투사건은 남북관계를 급랭시켰고 학술회의 추진도 진전이 없었다.
북한이 잠수함사건을 사과하고 남북관계가 완화조짐을 보이자 학술회의는 올초부터 다시 추진됐다. 최회장은 베이징과 서울을 오가며 북한측 인사와 연쇄 접촉, 제2차 학술회의를 봄에 개최한다는데 거의 의견을 접근시켰다. 그러나 황장엽씨 망명사건으로 남북관계는 다시 한번 요동쳤고 학술회의도 또다시 제동이 걸렸다. 황씨가 서울에 안착한 뒤 북한측에서 학술회의개최를 위한 예비접촉을 갖자는 연락이 왔다.
예비접촉은 5월15, 16일 베이징에서 있었다. 한국일보사에서는 박정수 특집기획국장과 이병규 정치부 차장이, 북한측에서는 김경남 통일문제연구소 부소장과 이금철 통일문제연구소 연구원이 참석했다. 물론 최회장도 참석했다. 북한측은 학술회의 명칭을 「모임」으로 하고 참석자를 북한문제전문가 일변도로 하지 말고 각계인사가 동참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개최일은 가능한한 빨리 개최하자는 한국일보사측 의견이 받아들여져 6월30일과 7월1일로 결정됐다. 북한측은 지난달 24일 하오 8명의 참석자 명단을 통보해 왔다.<베이징=특별취재반>베이징=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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