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증요법보다 국민의식개혁을”/“작금의 난국 정신문화의 황폐화서 비롯된 것/효등 전통덕목 앞세울때 총체위기 극복 가능”고려대 홍일식 총장은 『정치·경제 등 한 나라 민주화의 수준은 구성원인 국민의 의식수준을 정확히 반영한다』며 『총체적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상에 대한 대증적요법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대대적인 국민의식 개혁운동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현재 우리사회는 분야를 불문하고 중대한 분기점에 서 있다』고 평가한 홍총장은 『작금의 혼돈은 변화의 방향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관성에 따라 움직인 결과인 만큼 사회 전반의 인식전환이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편집자 주>편집자>
―한국경제는 장기적인 불황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지금까지 우리 경제가 「험한 산길」을 걸어 왔다면 이제부터는 「질퍽한 물길」을 헤쳐나가야 합니다. 산길을 걸을 때는 강인한 체력과 담대한 의지만 있으면 충분했지만 물길은 다릅니다. 물길을 헤쳐나가려면 지혜와 슬기를 함께 모아 배를 만들고, 돛을 달고, 노를 다듬어야 합니다. 예전처럼 체력과 의지만으로 「하면 된다」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무모합니다.
우리 경제의 장기적 불황은 이러한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파생된 측면이 강합니다. 모두의 손·발과 마음을 맞추는 화합의 경제철학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총체적인 혼란기를 맞아 지식인을 포함한 전 국민이 정신적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시대정신은 무엇이며 어떻게 정신적 혼란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개화기의 민족적 시대의지가 국권의 수호였고 일제시대의 그것이 국권의 회복이었다면 현재의 시대의지, 혹은 시대정신은 분단시대의 극복과 통일민족국가의 건설입니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어긋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반동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통일에 대해 낙관적입니다. 구소련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15개의 국가가 연방으로 통합됐지만 이데올로기의 붕괴후 각기 독립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경우 반대로 이데올로기가 한 민족을 둘로 갈랐으니 이제 통일은 역사의 필연이요, 순리인 것입니다. 더이상 사소한 사안에 매달려 큰 흐름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시대정신에 철저히 충실하는 것이 정신적 혼란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국민의 정신개혁·의식개혁운동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며칠전 등산길에 엄마와 나들이나온 초등학생이 휴지를 버리는 것을 보고 타이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수긍하고 부끄러워했지만 아이의 엄마는 「왠 간섭이냐」는 투의 못마땅한 반응을 보여 씁쓸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후기산업사회를 거쳐 현재 고도 정보화사회의 초입에 서 있습니다. 그동안 물질문명은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이와 반비례해 정신문화는 황폐할대로 황폐해졌으며 첨예한 대결의식, 즉자적인 상황논리에 매몰돼 있습니다. 경제전쟁은 생존과 직결되므로 과거 이데올로기전쟁의 시기보다 더욱 첨예한 경쟁논리, 비인간화논리가 득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낙후한 물질문명은 건전한 정신문화로 쉽게 극복할 수 있으나 낙후한 정신문화는 뛰어난 물질문화로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위기를 다만 정치·경제의 위기로 볼 것은 아닙니다. 저는 작금의 위기상황이 정신문화의 황폐화에서 비롯됐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방향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고는 해도 「효」정신 등 굳건한 정신문화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한 국민의 정신개혁과 문화의 저변확대를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최근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가 화제인만큼 당시 얘기를 해 봅시다. 태종은 재임시 엄청난 독재를 행한 폭군이었습니다. 그는 민심이 돌아오지 않자 재임 18년에 셋째아들인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았습니다. 이후 세종은 집권 2년이 되던 해에 문치의 상징인 「집현전」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정치상황으로 볼 때 이는 세종의 정책이라기 보다는 독재로 이반된 민심을 수습키 위한 태종의 정책의지로 보는 것이 타당한 분석입니다.
조선조 문화정책의 절정은 한글의 창제입니다. 한글은 「훈민정음」서문이 밝히듯 가여운 백성이 편하게 쓸 수 있도록 한 것으로 국민들에 대한 일종의 문화적인 보너스였던 것입니다. 한글이 순수하게 백성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글이었다는 점은 세종조의 모든 공·사문서가 모두 한문으로 작성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백성을 교화하기 위한 고도의 문화정치 덕택에 조선은 500년에 이르는 장구한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돈 안드는 선거를 비롯, 올바른 선거문화의 정착이 가능할 것으로 보십니까.
『이번 대통령선거는 어떻든 우리 정치사에 중대한 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물론 돈 안드는 선거에 대한 실험의 장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국민수준과 이번 선거에 대한 관심도로 보아 대중연설 등을 제한하는 등의 법개정을 통해 돈 안드는 선거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의 언론사별 TV정책포럼을 통해 우리 국민중 상당수가 예전의 지지자를 바꿨다는 조사통계는 이런 측면에서 상당히 고무적이며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와 관련해 국민들에게 특별히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현실의 어려움과 혼란상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역사의 큰 흐름을 간과해 실망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4·19혁명으로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5·16쿠데타 등 숱한 정치적 격랑을 겪으면서도 우리 국력은 끊임없이 발전해 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인의 자질, 대통령의 자질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또 특별히 정치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 주십시오.
『정치인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공통된 특징은 무엇보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바빠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책을 읽지 않는다면 최소한 책을 읽은 사람의 식견을 듣고 소화하려는 노력은 보여야 할 것입니다. 외국의 정·재계 지도자들의 경우 국·내외 학자들을 만나 대화하기를 즐기며 그들의 식견을 귀담아 듣고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반면 우리 정·재계 등의 지도자들은 주로 자기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식견을 자랑하고 자기 입장을 선전하려고만 듭니다. 한마디로 자기계발이 없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한 상황입니다. 탈출, 망명도 잇따르고 있습니다.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 우리 정부는 어떤 정책을 펴야 할까요.
『독일의 통일을 가능하게 한 가장 큰 원인은 서독의 막강한 자본력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시각입니다. 그러나 저의 견해는 좀 다릅니다. 물론 자본의 힘은 막강했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독일 통일의 배경에는 무엇보다 서독의 우수한 문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서독의 문화가 저급해 천민자본주의가 판치고 있었다면, 그래서 동독인들에게 통일이 되면 서독의 부에 이용당하고 서독의 정권에 유린당할 것이라는 의심이 있었다면 과연 동독의 군과 경찰, 정보기관등이 가만히 손놓고 있었겠습니까. 격렬하게 저항을 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집단탈출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출세를 포기하는 대신 자손들의 인간적인 삶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통일을 수용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국민들이 헐벗은 북한주민을 돕기 위해 라면박스에 양말, 신발, 헌 옷 등을 챙기는 범국민운동을 펼쳐 세명중 한명이라도 동참한다면 이러한 소문이 연변 동포사회를 거쳐 북한 주민들에게 흘러들어갈 것입니다. 민심은 천심입니다. 북한 주민의 마음이 남한과의 통일로 기울게 되면 어떠한 폭력적인 정권도 이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북한에 대한 통일 정책도 문화적인 접근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최근 한총련사태를 계기로 학생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가 큽니다. 학생운동의 바람직한 방향을 말씀해 주십시오.
『민주주의의 본질은 곤이지지입니다. 즉 태생적 본능에 따라 움직이거나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해보고 곤란을 경험한 뒤 더 나은 방향으로 고쳐 나가는 것입니다. 학생운동은 그간 엄청난 실험을 했으며 숱한 시행착오를 경험했습니다. 저는 운동권 학생들이 과거의 경험을 통해 배우기를 기대하고, 또 그렇게 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정말 문제라고 여기는 것은 아무런 비판도, 동조도 없이 방관하는 대부분의 중간계층 학생들입니다. 이들 사이에 팽배해 있는 이기주의, 개인주의를 타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부분이야말로 교육이 책임져야 할 부분입니다』
―정부의 교육개혁 정책과 현재의 대학입시제도에 대해 평가해 주십시오.
『교육개혁의 성패는 대학입시제도에 달려있습니다. 정부가 교육개혁의 기치를 다양화·국제화로 내걸고 있지만 아직 관의 입김이 너무 큽니다. 교육정책, 나아가 대학입시제도는 획일화하면 할수록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일선 교육기관의 권한이 대폭 신장되는 방향으로 과감하게 바뀌어야 합니다. 교육부와 우리 정부는 대학의 자율성이 신장돼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후유증이나 부작용을 우려한 나머지 결정적인 순간에 대학의 권한을 무시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대학도 이미 경쟁시대에 접어 들었습니다. 만일 대학의 자율적인 정책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날 경우 교육의 수요자인 학생들과 기업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다. 교육개혁 성패의 관건은 대학입시제도에 대한 대학의 권한강화에 달려있습니다』
―고려대 총장에 취임하신 뒤 「효」교육을 강조해 오셨습니다. 젊은 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재임 초기부터 「바른교육 큰사람 만들기」를 기치로 「저희가 먼저 매를 맞겠습니다. 저희가 먼저 매를 들겠습니다」라고 공포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도덕과 인성 등 전통적 덕목을 강조하다 보면 고루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미래학자들도 지적하듯 미래지향적인 덕목입니다. UN이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로 표방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의 전통 「효」사상은 인간의 기본적 덕목인 인본주의와 이타주의, 인내와 평화공존의 정신이 담긴 철학이자, 신앙입니다. 이같은 덕목은 후기산업사회와 정보사회에 등한시되거나 결핍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전통 덕목을 중심으로 범국민적 의식개혁운동이 펼쳐져야 하며 이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은 막중합니다』<인터뷰=최윤필 기자>인터뷰=최윤필>
□약력
▲1936년 서울 출생
▲59년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64년 고려대 대학원 졸업(문학석사)
▲66년 고려대 문과대 강사
▲72년∼현재 고려대 문과대 교수
▲78∼90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소장
▲82년∼현재 남북교수학술교류위원회 위원
▲82∼93년 문교부 학술진흥위원회 부위원장 내무부 체육부 총무처 자문위원
▲83년 미 하와이대 객원교수
▲91년∼현재 현대문학연구회 회장
▲92∼94년 성곡학술문화재단 운영위원장
▲94년∼현재 고려대 총장
▲97년∼현재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상임고문
▲97년∼현재 공동체의식개혁국민운동협의회 상임공동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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