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이순원의 ‘시동에서’(황종연의 소설 읽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이순원의 ‘시동에서’(황종연의 소설 읽기)

입력
1997.06.25 00:00
0 0

◎연민과 페이소스의 감흥/온정주의에 함몰된 느낌도이순원의 「시동에서」(「현대문학」 6월호)를 읽으면 그가 최근 들어 상상적 지지학 같은 것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은비령」에서 환상적인 지리적 공간을 그려낸 바 있는 그는 이번 작품에서는 동해안의 한 벽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곳은 피서객이 드나드는 여름 한철을 제외하면 일년 내내 한적한 작은 마을이다. 「동쪽의 시작」을 뜻하는 그 이름에서부터 흥미로운 사연에 대한 기대를 부추기는 그곳은 인간적 의미로 착색된 특별한 장소로 다가온다.

「시동에서」의 이야기는 행락객이 모두 떠나가 마을 전체가 적막함에 빠진 가을이라는 시간, 그리고 해동여관이라는 뜨내기들의 공간과 그 주변에 한정되어 펼쳐진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서술의 초점은 해동여관에 묵고 있는 작가 신분의 「그」라는 인물이다. 이러한 시공간적 제한과 전략적인 서술 초점은 당연히 시동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시동을 일상적 현실의 외부에 자리잡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작중 인물들의 갖가지 사연 속에서 드러나는 시동은 동쪽의 시작이라는 이름과는 배치되는 성격을 띤다. 손상된 가족관계로 인한 방황 끝에 마을로 흘러든 카페 여급, 위세 있던 역무원 시절에 대한 미련에 사로잡혀 있는 노인, 그밖에 이런저런 범행을 저지르고 그곳에 숨어든 여관의 식객들은 시동이 절망한 인생의 종점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곳의 황폐함은 서울에서 가정을 버리고 돌아온 어느 여자가 어린 시절에 자신을 강간한 남자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사건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다. 「시동에서」에는 그처럼 내면적으로 훼손된 사람들의 불행이 관찰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그것에 감응하는 마음 또한 드러나 있다. 「그」는 주변의 안쓰러운 인물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으며, 그래서 시동이라는 장소를 진한 페이소스에 물들게 한다.

요즘처럼 삶을 고양시키는 감동적인 소설이 드문 시대에는 「시동에서」가 주는 감흥도 사소한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약점이 적지 않은 소설이다. 예컨대 「상처받은 영혼」이라는 식의 개관이 인간의 절망적인 현실에 대하여 알려주는 바는 거의 없는 것이다. 작가에게는 부디 부질없는 훈수이기를 바라면서, 현실적인 것의 상투적 표상들과 싸워야 하는 소설의 과제는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온정주의로 대신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문학평론가·동국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