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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코리아’ 멸종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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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코리아’ 멸종위기

입력
1997.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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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면도기·운동화·봉제완구 등 급속히 사라져가는 국산공산품/저가품은 후발국에 쫓기고 고가품은 선진국을 못따라가고…/멸종되는 품목은 늘어가는데 대체 신제품은 나타나질 않는다커피메이커 94.8, 전기면도기 81.0, 토스터 79.7, 핸디진공청소기 71.5, 믹서기 63.4, 전기다리미 58.0, 전기오븐 57.6, 헤어드라이어 50.2….

이게 뭘까? 국내시장에서의 국산 소형가전제품 「멸종 위기지수」다.

동식물만 멸종하는게 아니다. 세계시장에 파고 들어 우리나라를 아시아의 「용」으로 키웠던 공산품들이 이미 무참하게 멸종했거나 멸종위기에 몰려 있다. 고유의 동식물이 환경악화로 절멸하기 전에 외래종에 잡아 먹혀 위기를 맞듯 아직은 살아남을 것 같은 공산품도 우세한 외래품에 밀려 생명이 단축되고 있다.

동식물이 일단 멸종위기를 맞았을 때 그 개체수를 적정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공산품도 마찬가지다. 멸종위기에 흔들리고 있는 국산 공산품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상상 이상의 시간과 자금이 들어 간다.

취재팀은 국산 공산품의 멸종 위기지수를 그리 어렵지 않게 작성할 수 있었다. 수입품의 국내시장 점유율(혹은 수입침투도)이 그대로 멸종위기 지수와 일치한다. 수입품의 국내시장 점유율이 100%일 때 멸종위기 지수는 100으로 해당 국산품은 이미 멸종했음을 의미한다.

현재 가장 심각한 멸종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소형가전제품. 커피메이커 94.8을 비롯해 전기면도기 토스터 등이 이미 멸종 카운트다운에 들어가 있다. 외국산 고급유명 브랜드가 판치고 중국·동남아의 저가품이 밀려오는 와중에서 국산 공산품은 샌드위치 신세가 되고 있다. 특히 국산 소형전자계산기의 멸종 위기지수는 100에 근접했다.

대형가전제품도 3년쯤 지나면 같은 신세가 될 지도 모른다. 냉장고, 대형TV, 세탁기 등 대형가전제품의 수입침투도는 현재 10%에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멸종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이들은 「수입선 다변화제도」라는 보호막 아래 버텨왔지만 99년이면 이 보호막도 사라진다.

자동차도 그리 여유있는 처지가 아니다. 유형·무형의 보호막이 다 사라지고 나면 미국과 일본의 공략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 지 우려된다. 대만은 가전시장을 완전히 개방한 후 외산점유율이 70%가 됐다.

국산운동화는 멸종 속도가 가장 빠른 공산품의 하나다. 운동화 제조업체는 90년 302개에서 96년 159개로, 종업원은 13만5,000명에서 2만4,000명으로 줄었다. 왕자표, 말표, 범표, 진양 3000번 등 한국의 대표적 상표는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나이키, 리복 등 외제가 판치고 프로스펙스 르까프 액티브 등 외국식 이름을 단 국산품이 힘겹게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신발류의 멸종 위기지수는 23.5. 언뜻 안심이 되는듯 하지만 외산 증가율이 93년 이후 연평균 85%에 이르고 있다. 이 속도대로라면 3년 뒤 멸종위기 지수는 50에 도달한다.

중저가 안경테는 중국산에 밀려 2000년 이전에 멸종할 것으로 보인다. 원사 부문에서 장갑·걸레용 실을 만드는 국내 80여개 업체가 거의 도산했다. 편물스웨터 면장갑 타올 플라스틱슬리퍼 작업화 가발 나무젓가락 이쑤시개 등도 중국·북한제에 밀려 멸종지수가 100에 가깝다.

87년 8억5,000만 달러에 달했던 봉제완구 수출은 현재 1,000만 달러 수준으로 떨어졌고 업체들은 대부분 해외로 진출, 국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가구산업도 위기다. 외제의 국내시장 점유율이 10% 수준이나 수입증가율이 연 25%. 고급품은 이탈리아 등 선진국, 저가품은 원목생산국의 공격을 받고 있다. 외국산 화장품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5.6%, 향수는 18.7%이지만 수입품 판매가가 수입가의 3∼5배라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멸종위기 지수는 화장품 20, 향수 70∼80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해외시장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한때 세계시장을 주름잡던 한국산 가방·핸드백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87년 11.2%에서 97년에는 2.2%로 하락했다. 완구·실내오락기도 세계시장 점유율이 87년 11.5%에서 93년에는 1.5%로, 스포츠용품은 87년 8.4%에서 93년 2.3%로 큰폭 하락했다.

일부에서는 우리가 더 싸게 잘 만들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해외시장에 내다팔고 우리에게 필요한 값싼 제품을 수입해다 쓰면 된다는 「비교우위론」을 들어 공산품 멸종위기를 심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지만 일본이 아직도 세계 소형가전제품 시장을 장악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쑤시개마저 고급화해 수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꼭 맞는 것은 아니다.

노동집약적인 저가품은 중국 등 후발국 제품에, 첨단기술이 필요한 고가품은 미국 일본 등 선진국제품에 시장을 내주면서 이렇다할 새로운 제품을 내놓지 못하는 우리 현실은 절멸종은 늘어나는데 신생종이 태어나지 않는 파괴된 생태계와 똑같은 모습이다.<조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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