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엔 언제 가나요”/영락없는 버선발… 코고무신 신고 “함박”/진흙탕 정글속 애증의 세월 주마등처럼「훈」할머니는 16일 귀한 선물을 하나 받았다. 하얀 코고무신 한켤레. 이날 프놈펜에 날아온 한국의 한 방송사 취재진이 사들고 온 것이다.
고무신을 두손에 받쳐들고 감격해 하던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고무신을 한짝씩 차례로 신어 보았다. 225㎜의 작고 가는 코고무신은 발에 맞춘듯 딱 맞았다.
50여년만에 처음 신어 보는 고무신이건만 『푹신푹신한 것이 매우 편하고 느낌이 좋다』며 그는 주름진 얼굴 가득히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조심스럽게 떼어보던 할머니의 걸음은 이내 날아갈 듯 빨라졌다. 큰 외손녀 시나(27)양은 『할머니가 고무신을 신더니 걸음이 두배나 빨라졌다』며 처음 보는 고무신을 신기한 듯 내려다봤다.
이곳 사람들은 무더운 날씨 탓에 슬리퍼 형태의 신발을 주로 신기 때문인지 발가락들 사이가 벌어져 있는 게 특징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버선으로 꼭꼭 감싸놓은 우리네 여인들의 발처럼 발가락이 좁게 모아져 있다.
할머니를 처음 찾았던 프놈펜 주재 한국인 사업가 황기연(43)씨도 이곳 사람들과 다른 할머니의 발가락을 보고 『한국인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 발에 고운 코고무신 한 켤레를 신겨드리고 싶었던 그의 바람이 이날 이뤄진 것이다.
아직 자신의 성과 이름을 제대로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렇게 바라던 「한국인」으로 인정받게 된 것만 해도 할머니는 마냥 기쁘다. 할머니는 최근 프놈펜에 들이닥친 기자들의 거듭되는 인터뷰 요청으로 평소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바쁘고 고달픈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봄소풍을 기다리는 소녀처럼 가슴을 설레며 귀향의 날을 손꼽고 있다. 몸은 피곤해도 갈수록 더욱 힘이 솟는 듯했다.
이제 「한국인」으로 돌아가자니 삶의 대부분을 보낸 이곳 캄보디아에서의 생활을 찬찬히 되돌아보게 된다. 일제와 일본인에게 짓밟힌 그를 또다시 구렁텅이에 빠뜨렸던 이곳 사람들에 대해 원망도 많이 했었다.
외아들을 앗아간 폴포트정권, 술주정꾼으로 아직도 할머니의 삶을 고단하게 하는 두번째 남편, 폴포트정권시절 자신이 외국인임을 밀고해 죽음의 벼랑으로 몰았던 이웃, 다다쿠마 쓰토무(지태력)가 67년 방문때 그나마 속죄하듯 남겨준 얼마간의 재산을 빼앗아 달아난 다다쿠마의 전 운전사와 요리사 부부…. 하지만 이미 그들을 용서한 할머니의 가슴속에는 곤궁할 때 크고 작게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보다 깊게 아로새겨져 있다.
누구보다도 잊을 수 없는 이는 첫딸 카오(94년 사망)를 숲속에서 낳았을때 해산을 거들었던 이웃 아주머니. 지금은 성도 이름도 잊었고, 어디에 사는지도 알 수 없지만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출산의 고통속에서 그의 손을 잡아주고 핏덩이를 받아 주었던 그 여인의 얼굴만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한창 장마때라 온통 숲은 진흙탕이었다. 그속을 뒹굴며 누가 들을까봐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세상에 내보내 놓은 가엾은 딸. 그 아주머니가 아니었던들 모녀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다다쿠마가 승려가 돼 도피의 생활을 하고 있을때 무작정 아이를 들쳐업고 그를 찾아나선 할머니의 소식을 다다쿠마에게 전해준 고마운 이도 있었다.
프랑스군의 일본인 색출작전을 피해 이곳저곳을 떠돌 때 피신처를 마련해 주거나 거친 밥이나마 나눠먹자고 권하던 순박한 캄보디아인들의 얼굴도 잊을 수 없다.
또 폴포트정권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칠 때 그에게 크메르어를 가르쳐주며 캄보디아인으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들, 중국인 비슷하다며 그에게 중국식 발음에 가까운 「훈」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던 이들….
그들에 대한 고마움은 무덤속까지도 간직하고 갈 것이다. 할머니는 오늘도 그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앞에 두손을 합장해 기도하고 있다.<프놈펜=이희정 기자>프놈펜=이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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