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희씨(상이군경)/전상 극복 불우이웃·군인자녀돕기 앞장한국전쟁 참전용사로서 눈과 고막, 다리부상으로 인한 신체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불우이웃들과 군인자녀들을 돕는데 앞장서 왔다. 황해 벽성에서 태어나 47년 동생과 월남한 이씨는 해군에 입대한뒤 51년 2월5일 해병대 창군멤버로 전입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통영전투 포항전투 인천상륙작전 등에 참전, 혁혁한 공훈을 세워 충무,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4후퇴때는 적의 포위망을 뚫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단지구전투에서 왼쪽 눈 감각파손, 왼쪽 귀 고막파열, 오른쪽 다리관통상 등 중상을 입었으며 하나 뿐인 동생도 해군으로 참전했다가 사망하고 81년 8월에는 차남마저 해군복무중 상병으로 순직했다.
상사로 전역한 뒤 버스와 택시운전으로 2남3녀를 어렵게 뒷바라지하면서도 86년 4월 「개인택시 보훈친우회」를 결성, 전쟁유공자 유가족들을 돕는데 힘썼다. 88년 7월 군납업체를 운영하게 된 뒤에는 수익금의 일부를 해군들을 위해 기증하고 양로원 등을 돕고 있다.
◎석애자씨(중상이자 배우자)/상이용사 돕기·가족 뒷바라지에 한평생
석씨는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양대퇴부와 손가락 3개가 절단된 1급 상이용사인 남편 허만륜씨와 71년 결혼해 상이용사들과 가족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20세의 나이에 상이용사와 결혼했으나 휠체어에 의존하는 남편과 어린 3형제를 부양하기 위해 행상과 파출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남편이 75년 4월부터 상이군경회 수원분회장 경기도지부 지도과장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는 동안 회원들의 고충과 부인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도와주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금도 의지할 곳 없는 국가유공자 4급 구경석씨를 장애자 편의시설을 갖춘 집에 데리고 와 돌봐주고 있으며 파출부로 번 돈으로 윤활유판매점을 개업, 남편이 사회에 적응하도록 배려를 했다.
자식교육에도 힘써 89년 6월 수원시 교육장 표창을 받았으며 장남과 차남은 상이군경회의 백의장학생, 국가보훈처의 모범장학생에 선발되는 등 모범학생으로 자랐다. 특히 장남은 대학졸업후 학군 33기로 임용, 전방포병중위로 복무하고 있다.
◎김호웅씨(미망인)/시부모 극진히 모시며 고아 50여명 양육
결혼한지 2개월만인 한국전쟁때 독립운동가 집안의 외아들인 남편을 잃은 김씨는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고아들과 독립유공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남편 이동철씨는 결혼 두달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자원입대, 그해 12월30일 철의 삼각지 금화지구에서 전사했다. 독립운동을 하다 옥살이 후유증으로 앓던 시아버지도 외아들이 전사한 충격에 몸져누우면서 김씨의 힘든 삶이 시작됐다. 결국 시아버지는 완쾌됐으나 전사한 남편사이의 유일한 혈육을 병마에 잃었다.
김씨는 슬픔을 잊고 안동으로 이주해 낮에는 공사장 잡역부로, 밤에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중 주위로부터 성실성을 인정받아 대형업체의 하청을 받는 행운을 얻게 됐다. 생활이 안정되자 김씨는 최소한의 생계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으로 고아들을 돕기 시작, 지금까지 50여명을 양육하고 진학시키는 등 주위로부터 「고아원장」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80년에는 새마을 부녀회장으로 도시새마을운동에 앞장섰으며 지금까지 60세이상 노인 70여명에게 경로잔치를 베풀었다.
◎박승엽씨(상이군경)/91년부터 젊은이들 안보의식 고양 온 힘
한국전쟁때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가 부상당한 뒤 어려운 생활을 불굴의 의지로 이겨내면서 젊은이들의 안보의식을 높이는데 헌신해왔다.
평남 중화출신인 박씨는 6·25가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뒤 고랑포, 문산지구에서 중공군과 인민군에게 포위당한 상황에서도 수류탄만으로 포위망을 정면돌파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52년 갑종 20기로 임관한뒤 동부지역 소대장으로 근무하던중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이다 온몸에 수류탄파편 57개가 박히는 중상을 입고 전상후유증으로 59년 4월 예편했다.
박씨는 예편후에도 신경마비와 다리관절 강직, 폐절제,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사업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나 성실성으로 결국 명찰제작사업에 성공한 후, 젊은이들에게 안보의식을 높여주기 위한 강의를 자청하고 나섰다. 91년부터 군부대의 요청이 있으면 달려가 지금까지 157회에 걸쳐 5만5,287명에게 자신이 겪은 생생한 전쟁경험과 공산주의의 실상을 전달하는 등 군장병의 정신전력강화에 크게 공헌했다.
◎박정용씨(특별보훈)/애국지사 후손… 민족정기 알리기 힘써
박씨는 애국지사 박희광선생의 후손으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희생정신을 후세에 알리는 사업에 열과 성을 다해왔다. 특히 91년 저축의 날에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는 등 근검한 생활을 하면서도 고아원과 경로당 등 불우이웃에게는 선행을 아끼지 않았다.
애국지사의 자손으로 어려서부터 혹독한 생활고를 겪었던 박씨는 일제의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던 부친마저 70년 타계하자 진학을 포기했다. 신문배달 포장마차 등 안해본 일이 없는 박씨는 78년 지방공무원으로 채용돼 78년부터 의료보험관리공단에서 일해왔다. 평소 검소한 생활로 박씨는 봉급의 60∼70%를 저축해 한국은행총재 저축상, 저축증대 유공 국무총리표창을 수상했다. 84년 구미 금오산 도립공원에 저축한 돈 1,000만원을 기증해 부친의 동상을 건립, 자라나는 세대에게 항일독립운동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했다. 또 대구사범 항일독립운동기념탑 건립추진위원으로 두류공원내 애국지사 조각동산 1,500여평을 확보하는 등 민족정기선양사업에 헌신했다.
◎심사평/최영희 심사위원장/나라사랑·역경이긴 꿋꿋한 삶에 숙연함 절로
「제24회 한국보훈대상」 후보로 추천된 분들의 공적을 심사하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그분들의 의로운 삶과 나라사랑 실천에 숙연한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올해 국가보훈처와 한국일보사가 접수한 후보자는 모두 20명이었다. 한분 한분의 공적을 살펴보는 동안 참담했던 지난 역사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을 던진 호국용사들과 그 배우자, 가족들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감사하고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금 절실했다. 상이군경들은 전쟁의 상처로 스스로의 몸도 가누기 어려운 가운데서도 눈물겨운 삶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실의에 빠진 동료 상이자들을 선도하고 불우이웃들을 돕는 등 정상인들조차 고개 숙일만큼 보람찬 삶을 창조했다.
결혼하자마자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자식까지 병으로 떠나보냈으나 시아버지를 극진히 간병하고 고아들과 불우한 학생들에게까지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않은 분, 휠체어에 의지하는 남편의 손발이 되고 자식들을 훌륭히 키워내는데 그치지 않고 어려운 형편의 국가유공자들을 지극한 마음으로 돌봐준 중상이자 배우자들의 삶은 눈물겹고도 거룩한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애국지사의 자식이라는 자긍심으로 고단한 삶을 꿋꿋이 이겨내고 부친의 동상과 독립운동기념탑 건립을 추진, 항일독립운동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한 특별보훈부문 수상자에게서는 참 애국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오늘이 가능했으며 미래 또한 밝다고 믿는다. 다만 올해는 상이군경부문에 너무나도 감동적인 후보들이 많아 유족·유자녀부문 대신 상이군경부문 수상자를 한분 추가하게 됐다.
올해 처음으로 심사위원장의 중책을 맡게 된 본인은 해방후 격변기에 국토방위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이번 심사를 하면서 후보자 한분 한분의 삶의 역정에 한없는 존경심과 숙연함으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24년째 「한국보훈대상」을 이끌어온 한국일보사에 감사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