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경기가 바닥이냐 아니냐를 묻는 저점논쟁이 있다. 바닥이라면, 그것을 딛고 다시 일어서게 되리라는 소극적인 낙관이 가능하다. 역설이지만 희망이 있다. 그러나 아직도 바닥이 아니라면, 나라도 민생도 눈앞이 막막하고 고달프다. 비관적인 상황이다. 추락이 어디까지 계속될 것인지 불안도 가중된다.바닥모르게 추락하는 것으로는 우리의 정치가 있다. 정치 공황이라고 표현하는 이도 있고 정치파산이 경제파산과 함께 왔다고 극언하는 이도 있다. 공황이든 파산이든 정치가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 원인은 여러가지로 이야기되지만, 가장 중요한 대목은 올들어 한보사태와 김현철사건을 거쳐 오면서 개혁의 정치적 주체가 실은 개혁의 대상임을 스스로 드러내게 되었다는 측면이다. 이로써 개혁은 성패를 논할 여지도 없어진 듯한 상황이다. 역사가 우리를 어떻게 배반하고 있는지를 목격할 뿐이다.
경제의 추락이나 정치의 파산 같은 오늘의 현실을 말하는 까닭은 지금이 바로 6월항쟁의 10주년을 맞이하는 때여서 그 역사적인 의미와 민주화의 추이를 따져보는 논의가 요청되고 있기 때문이다. 멀리는 3·1운동으로 부터 시작해서 4·19혁명, 그리고 부마와 5·18까지를 이어 「우리 사회 민주화의 획기적 전환점」이 되었던 것으로 평가되는 6월항쟁이, 그후 10년동안 과연 무엇을 이룩하였으며, 무엇을 어떻게 이루지 못하였던가. 민주화 운동의 결실이어야 했던 문민정부가 오히려 권위주의의 유산을 청산하지 못한 채 정경유착의 볼모가 되고, 경제-정치 동반추락의 난국에 처한 근본적인 까닭은 무엇인가. 6월항쟁 10주년이 요구하고 있는 우리 사회 민주화의 실천 과제는 무엇무엇이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지 않다. 또한 드러난 모든 과제들도 간단한 해법을 지니지 않았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향한 아래로 부터의 압력은 끊임없이, 힘차게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지난번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처리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그것이다. 6월항쟁의 맥은 살아있어서, 민주화가 역행하는 모습을 보일 때 마다 풀처럼 일어서고 있다. 개혁의 주체가 개혁의 대상임을 드러내도록 압박한 힘도 바로 살아있는 6월항쟁의 맥이라고 해야 옳다.
지금 정치는 나락을 헤매고 개혁은 역사를 배반하였으나, 지극히 다행한 일은 말의 길이 열려 있는 점이다. 요즘은 특히 아침저녁으로 「미디어 정치」가 만개한 상황이다. 대통령선거를 앞둔 정당후보와 후보의 후보라고 할 주자들이 TV화면을 통해 국민에게 직접 생각과 됨됨이를 털어놓고 있다. 인물과 소신에 차별성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등의 방법상 흠결이 있기는 하나 우리가 성취해야 할 「돈안드는 선거」를 향한 첫 걸음이다. 돈 적게 쓰는 선거, 규모를 줄이는 선거운동, 그러면서도 유권자의 평가가 확실한 선거야 말로 정치개혁의 요체다.
선거운동만 줄일 것이 아니다. 대통령에게 집중된 막중한 권한도 축소해야 한다. 대권이라는 말부터 줄이고 나누고 쪼개야 한다. 통치권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다. 돈안드는 선거, 권위주의 없이도 권위있는 대통령, 한없이 겸손하고 가난한 대권을 추구하는 정치개혁이라야 한다.
가난은 물질적 결핍으로서의 빈곤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사회적 물질적 결핍은 극복해야 할 인간 조건에 불과하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난은 물질적인 무한대의 소유욕망에서의 자유와 해방을 말한다. 더 작아지자는 것이다. 더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때마침 서울에서 열린 세계환경회의가 채택한 「환경윤리에 관한 서울 선언」이 그같은 겸손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무절제한 욕망과 과도한 물질주의 추구」를 지양해야만 인류와 지구와의 관계가 재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개혁이 추구해야 할 이념 역시 비슷한 것이다. 6월항쟁 10년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윤리적 덕목은 「작아지는 것」이다. 바닥모를 추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우리는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훨씬 더 가난해져야 한다.<본사 심의실장>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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