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주체사상 맹종 한총련 출범부터 잘못/사법처리엔 한계 ‘사회적 질책’ 필요지난 며칠 동안의 한총련사태로 이미 두명의 꽃다운 젊은이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신문에서, TV에서 대통령의 손을 잡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열차가 강제로 점거당했고 지하철운행을 중단해야 했다. 때문에 승객들은 아무런 이유없이 불편을 겪었다. 시가는 화염병과 최루탄이 교차하는 이른바 가두전투로 얼룩졌다. 시민들은 코를 막고 억지 눈물을 흘려야 했다. 대학병원의 환자들은 더 큰 고통을 느꼈다.
상아탑이라는 대학의 학생처장실이 강제로 점거된채 책상과 의자 등 기물이 파손되었다. 대학의 자유와 교수의 권위가 한없이 훼손당했다. 그래 놓고도 한총련은 기자회견에서 자진해산할테니 안전귀가를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남의 집 안방에 침입하여 장롱을 부수고 놀러온 이웃도 때려 숨지게 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겠으니 길을 비켜 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용납될 수 있는 일인가. 더욱이 한총련은 이석씨에 대한 상해치사의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한총련 집회를 원천봉쇄한 경찰에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그것이 정당한 주장인가.
한총련의 이적성과 폭력성은 이미 지난해 8·15연세대사태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러한 집회를 원천봉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국가의 의무와 책임이다. 그들이 아직도 「주체사상」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채 수만의 주민을 굶주림으로 몰아넣은 통치기구, 그 반국가단체의 전략 전술을 맹종하고 있음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미 한총련은 출범 당시부터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다. 이제 한총련 자신이 그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해체할 때가 되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이미 대중에게 판매할 수 있는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 동독이, 구소련이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의 참담한 현실이 그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한총련이 표방하는 주체사상은 이미 죽었다. 그것을 만든 소위 「리론가(이론가)」는 이미 북한을 탈출하여 우리 곁에 와있다.
이제 한총련은 옛날 60년대 서독의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가 70년 3월 해체한 독일사회주의학생연합(SDS)의 교훈을 직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 SDS는 해체하였는가. 우선, 지도급 구성원들이 현실감은 결여된채 극단적인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폭력성을 표방하여 국민들은 등을 돌렸다. 또 SDS는 현존 사회를 적대시 하는데만 의견이 일치하는 부정적 공동체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어떠한 목적을 성취할 것인가를 선택하여야 할 때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SDS는 구성원 자체가 점차 성숙한 면모를 보여 현실을 이해하고 사회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였다.
이제 한총련은 그들의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SDS의 현명한 결단처럼 「현실이 주는 진실」을 겸허히 받아들일 때가 온 것이다. 그것만이 비명에 간 두청년을 진실로 애도하는 길이고,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깊이 사죄하는 길이다.
앞으로 검찰은 한총련 핵심세력을 비롯한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를 철저히 할 것이다. 그러나 친북세력에 대한 형사사법적 대처방식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는 해도 유일하거나 궁극적인 대책은 못된다. 바로 작년 연세대의 한총련 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80년대초 이래 학생운동의 흐름을 보아온 대학선배로서 나는 이점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을 제거해야 한다. 지극한 애정으로 그들을 포용하되 그들의 잘못을 과감히 지적하고 호되게 꾸짖는 용기를 어른들이 보여주어야 한다. 특히 대학에 갓 입학한 저학년 학생들이 그 불순하고 사악한 권력추구 이데올로기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한 관심을 갖고 지도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학이 창조적 고독과 사색, 정신적 자유로 상징되는 지성의 전당으로서 제 기능을 찾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어른들의 임무이다. 그러한 임무를 게을리 한다면 우리는 마네 슈페르버의 말처럼 『이 세상에 살아남을 가치가 없는』 것이다.<서울지검 제1차장검사>서울지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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