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이 말은 가정의 로마 역사를 풀어가는 여러 화두중의 백미다. 이보다는 덜 대중적이지만 당시 로마사의 전개에 불만스러운 후세인들이 던진 또다른 가정의 화두는 카이사르 암살 후의 연설순서를 뒤바꾸어 놓아보는 것이다.풀루다크의 기록을 셰익스피어가 극화한 것에 따르면 카이사르 암살후 로마시민에게 부르터스가 거사의 명분을 역설했고 뒤이어 카이사르의 충실한 부하 안토니우스가 이를 반박했다. 부르터스의 연설은 카이사르보다 로마를 더 사랑했기에 공화정을 파괴하려는 카이사르의 「야심」에 비수를 꽂았다는 것. 카이사르의 야망이 로마를 위한 것이었다고 믿은 안토니우스의 연설은 로마에 대한 그의 헌신을 일깨운 것. 결과는 부루터스의 패배. 그러나 만일 부루터스가 안토니우스 뒤에 연설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루비콘강을 건너듯 한강을 건넜고 최후마저 유사한 우리의 한 군인정치가를 두고 논란이 분분하다. 그 시발은 로마의 경우와는 달리 「안토니우스」로부터 시작됐다. 한보사태 등 여러 현안으로 국가가 요동치는 한 켠에서 18년전에 죽은 지도자를 두고 벌어지는 이 첨예한 논쟁을 지켜보며 떠오른 것은 마오쩌둥(모택동) 탄생 100주년인 93년 중국의 모습이었다.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마오는 민간신앙의 대상이었고 그의 정적이었던 지도부는 그의 기여만을 기억했다. 그리고 영국의 BBC가 마오의 호색 등 그의 결점들을 들추어 냈을 때 『마오주석이 없었다면 신중국은 없었을 것』이라며 발끈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 마오가 다시 되살아났다면 그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스페인 종교재판관 앞의 재림예수였을 것이다. 민중의 마오 숭배 열기를 묵인하고 그의 과보다는 공을 기리는 중국지도부의 자세에서 마오를 완전히 극복했다는 자신만만함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구미에 참배객의 발이 줄을 잇는 가운데 「안토니우스」와 「부르터스」의 논쟁에 「로마시민」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감정은 착잡하다. 이미 정리하고 딛고 넘어섰어야할 「박정희」를 아직도 극복못했다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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